[살며 사랑하며-김재희] 아버지의 사랑

입력 2011-03-06 18:01


아침 일찍 서둘러 부산행 기차를 탔다. 우리 부부는 시아버지의 추도일이 되면 부산에 있는 아버님 산소에 간다. 시아버지는 결혼 전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실제로 그분을 뵌 적이 없다. 아버님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어떤 분이신지 궁금했다.

기차를 타고 가면서 남편에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달라고 했다. 아버님은 어떤 분이신지, 아버지와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는지, 기뻤던 일, 힘겨웠던 일 등을 알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아버지에 대해 이것저것 기억해 내려고 애를 썼지만, 그리 기억할 만한 좋은 추억거리가 없다고 했다. 아들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는 자신의 일에는 성실했지만, 가정에서는 그저 엄격하고 무뚝뚝했던 분, 칭찬에 인색하고, 아들이 집에서 공부하기만을 강요했던 그런 분으로 남아 있었다.

봄비 내리는 묘지 앞에서 나는 시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 가족을 북에 두고 홀로 남쪽으로 내려와 힘겨운 젊은 시절을 보내셨던 분. 성실 하나 만으로 척박한 사회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고 가꾸려 애쓰셨던 분. 사랑을 쉽게 받지도, 또 표현하지도 못한 채 고립된 섬과 같이 외로운 삶을 사셨던 분.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마음속에 그분의 삶을 이렇게 그려봤다. 아버님의 마음속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을 텐데, 아들에게 전달되지 않은 아버지의 사랑은 공허하기만 했다.

아버님이 표현한 사랑의 방법은 아들이 사랑이라고 느끼는 표현 방법과 사뭇 달랐기 때문에 그 사랑이 아들에게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버님은 가정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또 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엄격하게 통제하는 것으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을지 모르지만, 아들은 따뜻한 인정의 말과 쓰다듬으며 격려해주는 부드러운 손길로 사랑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엇갈린 사랑의 표현은 마치 주파수가 맞지 않는 신호처럼 두 사람의 마음을 연결하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나보다.

아버지 밑에서 지내야 했던 어린 시절에는 그런 아버지가 힘겹고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많은 헌신과 수고했음을 알게 되었고, 답답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통제가 비록 최선의 방법은 아니었을지라도, 아버지 식의 자식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남편은 말했다. 만일 아버지에게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남편은 아버지 식의 사랑이 그분 나름의 사랑이었음을 인정해 드리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아버지의 치우친 사랑에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는지, 얼마나 좌절하고 분노했었는지도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돌이켜보니, 아버지도 사랑과 격려가 많이 필요한 측은한 사람이었음이 마음 아프게 느껴진다고 남편은 말했다. 딱딱함 속에 감추어진 아버지의 외로움과 아픔을 부드럽게 만져주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살아생전 아버지에게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해드리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했다. 보슬비를 맞으며 남편은 아버지를 쓰다듬듯 산소를 어루만지며 솟아오른 잡풀을 깨끗하게 손질했다. 어느새 남편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김재희 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