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말더듬증을 앓고 있지요”… ‘화투치는 고양이’

입력 2011-03-04 18:45


화투치는 고양이/이화경/문학에디션 뿔

이 소설집, 문제적이다.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고수의 손놀림이 느껴진다. 지난해 조선시대의 책 읽어주는 남자를 그린 장편 ‘꾼’으로 호평 받았던 소설가 이화경(47)의 두 번째 소설집 ‘화투 치는 고양이’(문학에디션 뿔)는 언어장애가 성장에 미치는 사회학적 보고서다.

표제작에는 ‘순국선열 및 호국 영령에 대한 묵념’을 외우지 못해 친구들에게 곤욕을 치른 후 말수가 줄어들고 등교를 기피하는 대신 혼자 살고 있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화투 치는 방법을 배우는 열두 살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는 무엇보다도 ‘및’이라는 부사를 참을 수 없어 한다. “댓잎마저도 바람에 스치면서 맘껏 소리를 내는데 그깟 ‘및’이란 말 한마디에 인생이 끝장나서 수만 마디의 말들이 사라져버린 사태가 견딜 수 없었다. 그놈의 ‘및’ 때문에 ‘미칠’ 것 같고 억장이 무너졌다.”(19쪽)

수업 중간에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한 뒤 빵과 우유를 사가지고 할아버지의 두 칸짜리 셋방을 찾아가는 소녀는 할아버지야말로 살아 있는 순국선열이자 호국 영령이라는 데 스스로 동의하며 웃는다. 고루하기 이를 데 없는 여든여섯 살 할아버지와 열두 살 소녀의 친구 되기는 그러나 울컥 치미는 슬픔을 동반한다. “애초에 말이 필요 없는 게 화투판이라는 점이 제일 맘에 들었다”는 대목은 말 더듬는 소녀의 콤플렉스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먹을 게 없어 내놓을 것이 마땅치 아니할 때는 비풍초똥팔삼과 같은 버려도 아깝지 않을 것을 던지는 것도 일종의 대책이 되며 삶에는 우선순위가 있다는 심오한 비유를, 그때 나는 조금 알게 되었다.”(22쪽)

할아버지로부터 화투를 통해 인생을 배우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다음부터다. 할아버지는 쥐덫으로 잡은 쥐고기를 연탄불에 정성스레 구워 놓고 화투에서 진 사람이 쥐고기를 먹는 내기를 하자고 한다. 소녀가 할아버지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이것은 그냥 괴기가 아니라 약이다. 약. 소싯적에 동네에 어버버 말 더듬는 놈이 하나 있었는디, 벨 약을 다 써도 백약이 무효했는디, 쥐고기를 묵고 싸악 병이 나아불어서 청산유수로 말을 잘하게 된 것을 보았더니라.”(31쪽)

말더듬이는 표제작뿐만 아니라 단편 ‘초식’에도 등장한다. 군 복무 시절 소대장이 장갑차에 처참히 깔려 창자를 다 내놓고 죽은 것을 목격하고는 소의 내장을 결코 먹지 않게 된 3인칭 주인공 ‘그’에게는 형에 대한 몹쓸 기억이 있다.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가 형이 칭얼대는 자신을 남겨 놓고 하산하는 바람에 밤이 이슥토록 산을 헤매다 가까스로 구출된 기억이 그것이다.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그가 말을 더듬게 된 것은. 북한산에서 버린 것도 모자라 부모님이 제때 찾지 못하도록 가지도 않은 관악산을 둘러댄 형의 심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84쪽)

작가는 왜 이번 소설집에서 말더듬이라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일까. 2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난 이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은 성장과정에서 일종의 언어장애를 앓게 마련이지요. 언어와 타자, 언어와 세상 사이에는 거리가 있기 마련인데 그 거리 때문에 타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것이죠. 하지만 언어와 세상 간의 거리는 좁혀지거나 메워지지 않는다는 건 거의 진리에 가깝지요. 성장과정의 콤플렉스는 결국 메워지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문학적 표현으로서 언어 장애를 주제로 끌어들인 것이죠. 사실 말(언어)에 장애를 느끼지 못하는 건 정치가나 웅변가 부류일 거예요. 세상과 언어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작가들이야말로 심각한 언어장애자가 아닐까요.”

그렇더라도 소녀가 쥐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가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작가의 대답 역시 명쾌했다.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나와서 생존해야 할 때 직면하는 것은 약육강식이 판치는 육식의 세계입니다. 자신이 먹기 싫은 고깃덩어리를 입에 물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는 게 바로 인간이라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닐까요. 그걸 베어 물지 않으면 언어장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성장의 고통을 그리려고 했지요. 모든 소설은 결국 고통 받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한다는 독일 교양소설의 범주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