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참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삶의 풍경… 김숨 소설집 ‘간과 쓸개’

입력 2011-03-04 18:05


오래 참는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소설가 김숨(37·사진)의 경우가 그렇다. 그의 세 번째 소설집 ‘간과 쓸개’(문학과지성사)는 오래도록 삶의 물질적 조건들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느껴지는 작품집이다. 표제작의 주인공은 올해 예순일곱 살인 간암환자다. 작가가 자신보다 두 배쯤 나이가 많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글을 쓴다는 것은 남들보다 두 배쯤 더 시간을 할애해 죽음을 앞에 둔 노인을 응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평택 땅 300평을 처분해 3남1녀에게 나누어주고 병치레 중에 있는 주인공은 1981년에 지어진 천안의 누옥에 사는 홀아비다. 서울의 한 종합병원을 버스로 오가며 통원 치료를 받고 있는 그는 복부에 구멍을 뚫고 호스를 끼워 쓸개즙을 빼내야 하는 큰누님을 만나러 갈 마음을 먹지만 번번이 기회를 놓친다. “조치원 고향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저수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누님이 나를 데리고 그곳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겨우 대여섯 살이었다. 밤나무 숲을 지나 저수지가 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감에 떨었던 기억이 났다.”(15쪽)

그러다 버섯 키우는 친구가 건네준 골목(?木)에 버섯이 열리는 것을 본 ‘나’는 차일피일 미루던 누님을 찾아간다. 누님은 ‘나’에게 “저수지에 너를 데려간 것은 아무래도 내가 아니지 싶다”라고 말해준다. 저수지에 ‘나’를 데려간 것은 마흔도 안돼 세상을 뜬 셋째 누님이었던 것이다.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 골목 껍질을 가르고, 토독토독 표고버섯 맺히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48쪽)

이렇듯 김숨의 문장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아프게 감지되는 삶의 내밀한 풍경과 시간의 축적이 새겨져 있다. 표제작 뿐 아니라 소설집 곳곳에서는 병든 인물들이 등장한다. 북쪽 방에서 유폐되듯 갇혀 살아가는 노인(‘북쪽 방’), 네 번째 뇌수술을 앞두고 있는 사내(‘내 비밀스런 이웃들’), 간암으로 두 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여전히 계단을 허물자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옆집 남자(‘흑문조’)등은 불가항력적인 질병이나 가난에 사로잡힌 이들 화자들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몸과 직면하게 하고,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가의 웅숭깊은 시선을 느끼게 한다. 김숨은 앞으로도 오래 지켜보면서 이야기를 건져올릴 것이다. 단편 ‘북쪽 방’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연금술을 통해 납을 금으로 변환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욕망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광물의 변형은 인간의 의지 바깥에 있다. 인간이 기원전부터 연금술에 집착해왔지만 도료와 착색의 가공기술밖에 더 낳았는가. 그것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다.”(131쪽) 눈속임의 문학을 믿지 않는 소설가 김숨의 작품들은 그래서 수명이 길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