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화련]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

입력 2011-03-03 19:38


내가 기억하는 맨 처음 책은 ‘진달래 군과 개나리 양’이라는 만화책이다. 지은이와 내용은 잊었고 제목만 생각난다. 글자를 알기 전이어서 어머니가 읽어 줬는데 진달래 군이 남자라는 설명에, 고운 꽃이 왜 남자인가 의아했었다.

그 책을 여태 기억하는 건 책이 귀하던 때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1960년대만 해도 시골에서 책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들을 위한 책은 더욱 찾기 어려웠다. 학교에 들어간 뒤 책에 대한 갈증이 많이 풀렸지만 학교 도서실이 늘 열려 있지는 않았고 거기에 책이 많지도 않았다. 책 읽기를 좋아한 어머니가 장터나 이웃 마을에서 구해 오는 것을 아무거나 다 읽었다. 어머니의 독서 이력이 곧 내 어린 시절 독서 이력이 되었다. 나는 미우라 아야코의 ‘빙점’과 이광수의 ‘흙’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읽었다.

지금은 책이 넘쳐나는 행복한 세상이다. 도서관도 아주 가까워졌다. 작은 도서관 덕분이다. 멀리 있는 시립도서관을 대신해 사람들 곁으로 다가왔다. 포항에는 2008년 문을 연 죽장의 선바위 작은 도서관을 시작으로 큰솔, 두무치, 버드내, 큰섬마을 등 스무 개의 작은 도서관이 생겼다.

작은 도서관은 독서 모임을 만들고 문화 강좌를 열어 사람들을 끌어안는다. 아기를 업은 새댁도, 칠순이 넘은 어르신도 함께 책을 읽고 공부를 한다. 그들은 대개 매력적이다. 눈빛이 맑다. 눈빛 맑은 사람들이 도서관에 모인다. 동네 사랑방에 마실꾼 모이듯 친구끼리 이웃끼리 모여 마음을 나눈다.

그 사랑방에는 아이들도 스스럼없이 드나든다. 학교에서 곧장 온 듯 가방을 멘 채 책을 고르는 아이, 제 방처럼 털버덕 주저앉아 동화를 읽는 아이, 책을 보다 말고 골똘히 생각에 잠긴 아이…. 아이들이 스스럼없이 도서관을 찾는 것은 상서로운 조짐이다. 혼자 책을 고를 줄 알고 그만큼 책과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책만한 보약이 있을까. 카이스트 뇌공학과 정재승 교수는 ‘책 읽는 뇌가 아름답다’라는 글에서 “독서는 지혜로 가득 찬 뇌를 발명한다”라고 했다. 지혜로 가득 찬 아름다운 뇌, 아름다운 생각으로 열어가는 드넓은 세상! 아이가 책을 읽는 것은 스스로 등불을 밝히는 것이다. 자신과 세상을 위한 희망의 등불을 켜는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도 “어릴 때 즐겨 찾은 도서관에서 꿈을 키웠다”며 “지금 나를 있게 해 준 것은 우리 마을의 작은 도서관”이라고 말했다.

고맙게도 작은 도서관은 멀지 않다. 마을회관이나 공원쯤에 자리 잡았다. 도서관에 가려고 큰맘 먹지 않아도 된다. 일하다 짬을 내 책을 빌릴 수 있고 시장 갔다 오는 길에 들러도 된다. 바람 쐬러 가듯 그냥 가도 괜찮다. 왠지 시들한 날, 괜히 조금 쓸쓸한 날, 도서관에 간다고 탓할 사람 없다. 도서관 서가는 책들의 숲, 서성거리기 좋은 그늘을 만든다. 서성거리고 있으면, 쓸쓸한 기색쯤 책 읽듯 읽어내는 눈매 고운 사서가 차 한 잔 줄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는 도서관 나들이에 재미 붙였다.

이화련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