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문화적 기업’이 예술가 살린다
입력 2011-03-03 19:36
‘최고은법’이 제정될 모양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책위의장이 ‘예술인복지지원법’을 임시국회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주무부처인 문화부의 정병국 장관도 의원 시절에 비슷한 법안을 발의한 적이 있으니 대세가 된 형국이다. 반대는 없다. 이 법의 문제점을 말하면 바로 최고은의 죽음을 욕되게 하니, 침묵의 카르텔이 형성되고 말았다.
최고은법이 최선이고 최고일까. 법안을 들여다보면 의외로 간소하다. 예술인공제조합을 설립하고, 예술인에게 일반 근로자의 지위를 인정해 건강보험과 고용보험 혜택을 받도록 하자는 것이 전부다. 정치권은 이것으로 손을 털고, 앞으로는 더 이상 예술인이 차디찬 방에서 굶어 죽는 일이 없도록 안전망을 깔았다고 생색 낼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들을 가까이 지켜본 사람은 이런 접근이 얼마나 과녁에서 벗어나 있는지 안다. 예술가라고 신용카드를 발급해 주지 않더라는 연극인의 발언은 본질을 벗어난 연극적 수사다. 개인의 신용과 사회적 평가는 엄연히 다른 것이다. 그래도 예술가들이 사회에서 중요한 존재이니 특별대우를 요구한다면 사회를 위해 특별한 기여를 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예술가들은 자신 있을까.
복지 그물망이 짐이 될 수도
복지의 그물이 오히려 예술가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다. 정부는 세금을 쓸 때 반드시 절차를 요구하는데, 이 과정에서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영혼이 성할리 없다. 복지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예술인임을 입증해야 하고, 자신의 사용자가 정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첫 단계에서 모욕감을 느낄 공산이 크다.
알다시피 예술가들은 남다른 성정을 가졌다. 김인혜 교수부터 비보이까지 영역과 캐릭터는 달라도 공통점은 자존심 세고 예민하다는 것이다. 최고은씨가 죽음에 이른 것도 복지의 그물이 듬성해서가 아니라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과정이었다고 본다. 그들은 원래 시혜 따위를 아주 싫어하는 족속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다면 예술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일터를 많이 만들어야 한다. 거기서 보람과 자부심을 느끼고, 격조 있는 삶을 실현할 수 있어야 만족한다. 그들이 낮잠을 자면서도 다른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심하게 꾸짖을 일은 아니다. 농촌에 총각이 널려도 도회의 독신 여성이 시집가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여기서 대두되는 것이 선택적 복지다. 보편적 복지 위에 가치 있는 삶을 꾸릴 장치가 필요하다. 유력한 대안은 문화적 특성이 반영된 사회적 기업, 즉 문화적 기업이다. 사회적 기업은 이미 유용성이 검증된 제도다. 우리나라는 2007년 ‘사회적기업육성법’을 제정한 이후 502개의 인증기업을 배출했다. 그 가운데 주목받는 것이 문화예술형 사회적 기업이고, 고용노동부도 성공가능성이 가장 높은 분야로 여기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문화적 기업이 사회적 기업의 일원화 체계에 묶여 성장에 제한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기업은 지역격차 혹은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복지의 종결자 역할을 할 수 있기에 정부도 사회책임의 차원에서 다르게 접근하기를 권한다. 문화 바우처 제도나 메세나 활동을 문화적 기업과 연계하는 것도 건강한 예술생태계를 구축하는 방법이다.
‘태양의 서커스’ 왜 못만드나
문화예술인들도 비전을 갖고 문화적 기업에 다가서야 한다. 국가가 먹여 살려주기를 바라기 이전에 특유의 상상력과 열정으로 산업을 일궈야 할 것이다. 연매출 5억 달러가 넘는 ‘태양의 서커스’도 문화적 기업에서 출발했다. 캐나다 퀘벡시 근교 베생폴이라는 작은 마을의 길거리 극단이 아트와 비즈니스를 끌어들이니 세계적인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한 것이다. 우리라고 ‘태양의 서커스’를 만들지 못하겠나. 결국 좋은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