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衆, 속을 드러내다…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
입력 2011-03-03 18:04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로널드 잉글하트·크리스찬 웰젤/김영사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경제가 성장하는데도 정부에 대한 불신은 점차 심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이명박 정부만 돌아봐도 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아우성은 점점 커지는 양상이다. 심지어 우리 국민 중 일부는 천안함 사태나 연평도 피격 사건에도 공격을 감행한 북한에 대한 적개심 보다 정부에 대한 불신을 더 많이 드러냈을 정도다.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돼 오랜 시기를 거치면서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보다 우월함을 입증해온 민주주의가 새로운 도전을 맞고 있다. 가장 이상적이며 현실적인 정치 체제로 추앙받던 대의민주주의는 이제 사람들의 참여가 시들해지고 정부에 대한 불신의 골이 깊어지면서 더 이상 대표성을 갖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처럼 현대 민주주의가 마주하게 된 갖가지 문제들을 정치·문화적 시각에서 접근해 분석하고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를 고찰한 ‘민주주의는 어떻게 오는가’가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저자인 미시건대 정치학과 로널드 잉글하트는 교수는 200여편의 저서와 논문을 통해 시민들의 가치 변화를 조사하고 근대와 문화, 민주주의의 역학관계를 분석하는 등 현대 정치학사에 중요한 틀을 제공한 세계적인 석학이다. 공동저자인 크리스찬 웰젤은 브레멘 국제대학 정치학과 조교수로 ‘유럽정치연구저널’ 등에 많은 글을 기고하는 등 독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출간된 원서는 전 세계 여러 국가에서 번역돼 주로 대학과 대학원에서 교재로 사용되는 등 정치학자와 정치 지도자들의 필독서로 손꼽혀온 역작이다.
잉글하트와 웰젤은 민주주의가 당면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고 민주주의는 왜 국가마다 다른 성취를 보이는지에 대해 증명한다. 이들은 1988년부터 전 세계 80여 개국을 대상으로 진행한 ‘세계 가치 서베이(World Value Survey)’를 통해 각국의 민주주의 사례를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이 과정에서 ‘자기표현의 가치(self-expressive value)’를 대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제시한다.
자기표현의 가치란 외적인 구속이나 지도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조건에서 형성된 자신만의 선호를 중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산업화는 합리와와 세속화, 관료주의화를 가져왔지만 지식사회의 등장은 또 다른 변화, 즉 개인주의적 자율성과 자기표현,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이끌었고 이로 인해 등장한 개념이라는 설명이다. 저자들은 자기표현의 가치라는 문화적 강조점이 집단적인 원칙에서 개인적인 자유로, 집단의 획일성에서 인간의 다양성으로, 국가적 권위에서 개인의 자율성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인간이 중심이 되는 인류애적 사회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인류발전을 이끌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들은 후기 산업사회에서 대중의 참여가 과거와 다른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한다. 우선 대중들이 주장하는 요구가 변했다. 과거 대중이 민주화와 같은 거대담론을 둘러싼 문제를 제기했다면 탈산업화 시기 대중의 요구는 다양화되면서 과거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었던 환경이나 낙태, 여성과 동성애자의 권리, 권력층의 부패 등과 같은 영역으로 확대됐다는 주장이다. 이어 대중들의 참여방식이 변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과거에는 집단적, 지속적으로 참여가 이뤄지고 그 결과가 나오기를 정치권에게 요구했다면 이제는 개인적, 일시적, 간헐적 참여가 이뤄진다는 지적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기관에 소속되기를 거부하게 되고, 결국 정당이나 노조 등의 가입률이 하락하게 된다.
“탈물질주의로의 이동과 엘리트에 도전하는 정치적 행동은 모두 후기 산업사회의 대중들에 있어서 권위, 정치, 성적인 역할, 그리고 성적 규범을 재형성하는 자기표현 가치로의 광범위한 이동의 구성요소다. 탈물질주의자들과 젊은이들은 물질주의자들과 나이 든 사람들보다 동성애에 대해 상당히 관대하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해방과 자기표현을 강조하는 인류애적인 규범의 성장이라는 광범위한 패턴의 일부분이다.”(227쪽)
그렇다고 이런 변화가 민주주의를 붕괴시키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 이들은 오히려 경제발전이 인류의 존재에 안전을 안겼다면 이제 자기표현의 가치라는 문화적 변화가 결국엔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며 인류발전에 이바지하리라고 판단한다.
각종 통계분석과 관념적이고 전문적인 학술용어로 가득한 원서를 번역한 책이어서 전문 지식이 없는 독자에겐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근대화가 일군 인류 최고의 산물인 민주주의를 둘러싸고 우리의 신념과 가치가 과연 어디까지 와 있으며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교양 지침서다. 저자들은 이런 주제들을 정치사회학과 문화인류학, 심리학과 종교학 등의 영역을 넘나들며 명쾌하고 묵직하게 짚어냈다. 지은주 옮김.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