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수꾼’ 윤성현 감독… ‘충무로 족보’ 없는 20대, 영화판에 뜨다
입력 2011-03-03 18:35
뭐야, 이건. 누구야, 넌.
영화 ‘파수꾼’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즈음 생기는 이 찝찝한 감정은 뭔가. 훌륭해도 적당히 훌륭한 척, 좋아도 적당히 좋은 척 해야 ‘있어 보이는’ 건데 이 영화를 치켜세우고 싶은 이 감정은 뭐냔 말이다. 원래 그런 거다, 기자가. 대상의 결점을 찾는 ‘매의 눈’이 실력이고, 무기이고, 지적 허영인데 객석에 앉아 배배 꼬인 두 팔 두 다리를 왜 이 신참 감독의 영화가 해체시켜놓느냐는 얘기다.
대드는 심정으로 이 찝찝한 영화를 한 번 분해하고 싶었다. 단편영화 세 편을 만든 후 첫 장편 ‘파수꾼’으로 신고식을 치른 29세 윤성현 감독을 만났다. 아시아 신인감독들에게 주는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스위스 블랙무비영화제 젊은심사위원상을 수상하고, 로테르담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영화계 ‘슈퍼 루키’를 불러내 “점심은 대충 커피로 때워도 괜찮죠?”로 시작하는, 이기적인 인터뷰에 들어갔다.
“김기덕 박찬욱 이창동 봉준호 같은 국제적 명성을 이을 차세대 감독 중 가장 두드러진 감독.”(미국 영화전문지 할리우드리포터) “세밀하고 날카로운 연출력이 요즘 아이들의 깊은 내면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간담이 서늘해질 만큼 잘 만든 영화.”(봉준호 감독) 충무로에서 연출부 생활을 하지 않은 20대 감독에 대한 평가로는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달짝지근한 칭찬을 듣는 그에게 요즘 어떠냐고 물었다.
“염세주의자예요, 제가. 목표라는 게 뜻대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영화는 운이 따라야 하는 도박성 강한 매체라서요. 제 친구들 중에 제가 제일 빠른 편이긴 한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거니까, 개인적으로 들뜨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이돌 그룹 리더도 아니고, 기획사 홍보실장이 A4 용지에 ‘굴림체’로 반듯하게 적어준 듯한 이 답변은 뭔가. 이토록 신선한 영화를 만든 ‘루키’가 이토록 진부한 답변을 하다니. 대단한 자의식과 적당한 자만심, 아티스트의 세포를 이루는 DNA는 그런 거 아니었던가? 아무리 신인이라도 말이다.
“장점을 꼽으라면 나무보다는 숲을 보는 거. 제가 남들보다 고민을 더 많이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야 영화도 좋아지는 거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영화계에 천재는 없다.’ 음악, 발레 같은 예술은 천재가 있겠지만 사람을 이해하고, 표현하는 게 영화인데 그런 분야에 천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워워 띄워주니까 ‘나 잘났나봐. 나 같은 시선 가진 감독이 없어.’ 그런 생각으로 만든 영화는 연출 공부하는 사람에겐 보여요. 매너리즘, 자만심에 빠질 때 그 사람의 영화가 안 좋아지는 계기가 되잖아요.”
아주 겸손하게 말했으나 대단한 자찬(自讚)이었다. 20대 감독이 늙수그레한 말을 자연스럽게도 한다. 근데 치장 같다는 느낌은 없었다. ‘고삐리’ 남학생이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 입은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는 아니었단 뜻이다. 남은 날이 훨씬 많은 청춘이 삶의 끝자락에 도착한 듯 말하는 건 뭔가. 청춘을 치열하게 보냈겠구나, 뭐 소위 말해 ‘참 많은 일을 겪어왔겠구나’ 싶은데, 그런 건 초면에 그것도 얼굴 본 지 10분도 채 안 돼 묻는 건 실례니까.
그는 어둡지만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 눈물이 나진 않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가슴 먹먹해지는 강렬한 영화로 신고식을 치렀다. ‘파수꾼’은 고등학교 세 친구 사이에 끼어든 지극히 사소한 균열이 종국에는 어떤 파멸에 이르는지 그린 섬세하고 예민한 영화다.
“큰 사건, 큰 맥락 속에서 한 사람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하지만 한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강력한 상처들이 상호 작용하면서 관계가 깨지는 거잖아요. 그런 면에서 사람을 이해하는 깊이 있는 시선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시나리오 쓸 때 항상 잊지 않는 말이 있어요. 제 어머니가 어렸을 때 해주신 말씀인데, 좋은 이야기는 두 가지밖에 없다. 하나는 특수한 소재 안에 보편성이 있는 이야기, 다른 하나는 보편적 소재에 특수성이 있는 이야기. 왕따, 중재자, 일진이라는 보편적인 세 캐릭터가 어떻게 입체적인 인물이 되느냐,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위치를 어떻게 넘나드느냐가 제 영화의 특수성이죠.”
‘파수꾼’은 신인배우들의 호연이 빛나는 영화다. 저예산 독립영화일수록 신선하지만 투박하기 쉽고, 강렬하지만 세련되기 힘든 이유도 좋은 배우를 데려다 쓰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예산일수록 배우들을 조련하는 감독의 몫은 커진다. 그는 배우의 영리함을 오디션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한다고 말했다. ‘슈퍼스타K’가 만들어낸 전국민 오디션 시대. 위압적이고 거만한 심사위원 앞에 선 나약한 후보자들의 생존경쟁은 아닐 테고.
“자기 정서를 컨트롤하면서도 또 컨트롤하지 않아야 하는 게 배우니까 영리해야죠. 그게 첫 번째예요. 대화를 하면서 ‘이 친구 이렇게 말하네. 이해력과 집중력이 있구나’ 그런 걸 보는 거죠. 오디션 잘하는 배우와 못하는 배우가 있는데 그건 연기력과 큰 상관은 없는 것 같아요. 내면의 깊이까지는 아니겠지만 연기를 대하는 방식이 중요해요.”
“처음 단편영화 찍을 때 대학 선배인 배우 한혜진과 연극배우 친구가 공동주연을 맡았는데 이들의 연기가 현실과 너무 떨어진 거예요. 실제 생활에서 저런 톤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반면에 정말 자연스럽게 연기하는데 막상 영화로 봤을 때는 극영화가 아닌 마치 다큐멘터리 같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고. 그래서 영화에 맞는 연기가 뭘까 하다가 저만의 연기관을 갖게 된 것 같아요. 신인배우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건 말하지 말고 상대 배우의 말을 들으라는 거예요. 그럼 자기 대사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니까.”
좀 유치한 질문을 던졌다. 누구처럼 되고 싶냐. 누구와 호흡을 맞추고 싶냐. 그는 굳이 꼽으라면 개그맨 신동엽과 작업하고 싶다 했다. 아주 유쾌하고 실없어 보이는 캐릭터인데 눈빛에서 슬픔이 보여서. 연기를 잘 할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일을 겪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 의외성이 좋다고 했다. 그럼 본인은?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영화 얘기 반, 개인적인 얘기 반으로 진행될 거라 했을 때의 답변은 이랬다. “좋아요. 개인적인 이야기.”
감독에게 영화 이야기를 물을 땐 일식집에 가서 회를 주문할 때처럼 당당한데,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문할 땐 서비스로 따라 나오는 멍게나 개불을 한 접시 더 달라고 할 때처럼 조심스럽다. 그래도 묻는다. 아티스트에게 사적 영역은 그가 만들어내는 공적 영역, 작품의 근원이다.
“기본적으로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받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좋다고 말하면 이상한 거죠? 차라리 나은 거죠. 상처받는 건 때로 삶의 에너지가 되기도 하는데 주는 건 그냥 막 황폐해지는 거잖아요. 죄의식이 누르니까.”
그는 ‘죄의식’과 관련된 이런저런 얘기를 꺼내놓다 다시 조심스러워했다. 기사에는 쓰지 말란다. 예민한 소년들을 그린 감독은 어린 시절 어떤 학생이었는지 묻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2, 3초 뒤 이렇게 말했다.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사고를 치지도 않고 평범했어요. 애늙은이 같단 말보다는 애 같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장난치는 걸 좋아해서. 유머러스하게 사는 게 더 좋잖아요.”
사실 신인의 거침없고 당당한 입담을 기대하고 그를 만났으나, 감독의 이야기는 상당히 정제돼 있었다. 그렇다고 가식적이었단 얘기는 절대 아니고. 2일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섰다. 진심을 말하지 않은 ‘파수꾼’의 소년과 그가 참 닮았구나. 신인은 거침없고 당당해야 한다는 것. 이 또한 얼마나 진부한 상상인가. 피식 웃었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