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0원짜리 아바타, 죽 배달 죽쑤다… And의 도전! 생활심부름

입력 2011-03-03 18:57


나이 서른이 넘었는데 제 몸 하나 간수 못하겠냐, 소싯적에 오토바이 좀 탔다, 강남에 살진 못하지만 자주 들른다…. 갖은 소리로 사장을 구슬려 열쇠를 받은 게 지난 1일 오후 4시다. 125㏄ 스쿠터. 사실 처음이었다.

버튼만 누르면 되는 초간단 시동법을 속성으로 배운 뒤 브레이크, 액셀러레이터 사용법을 듣고 있는데 문자메시지가 찍혔다.

‘논 △△△-□□ 본죽 540-3XXX/삼성동 ○○ 아파트 202동-□□□/8000원/잣죽1/30000원’.

뭐든 다 해준다는 생활심부름업체. 합법적인 거라면 가리지 않는다. 가장 많은 심부름은 배달되지 않는 음식 포장해 가져다주기다. 첫 번째 주문 역시 음식 배달이다.

“진짜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죽을 사서 어디로 가라는 것 같긴 한데 해독이 안 된다. 공황상태에 빠져 있는 꼴을 훤히 보고 있다는 듯 생활심부름업체 ‘애니맨’ 윤주열(41) 사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논현동 번지 찍힌 건 죽 가게 주소구요, 삼성동 아파트가 배달할 장소예요. 주문은 해놨으니 바로 픽업하면 돼요.”

‘물건 수령할 주소/배달할 주소/물건값/물건명·수량/가상계좌 잔액’이란 의미였다. 1회 심부름값 7000원을 손님에게 받으면 회사에 절반인 3500원을 줘야 한다. 매번 만나 정산하기 어려워 배달기사는 가상계좌에 미리 일정 금액을 넣어두고, 업체는 심부름이 한 번 끝날 때마다 이 계좌에서 3500원을 빼간다. 하루치 정도인 3만원만 충전했다. 다른 기사들은 보통 10만원씩 넣어둔다고 한다.

덜컥 해보겠다고 나설 수 있었던 건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을 믿었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입력하고 안내시작 버튼을 누른 뒤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500미터 전방에서 우회전입니다.”

자신감이 생기려는 찰나, 아무리 달려도 우회전이 나오지 않는다. 몇 번이나 오토바이를 세우고 내비게이션이 작동 중인지 확인했다. 멀쩡했다. 아직 400m나 남아 있다고 했다. 차로 달리는 500m와 초보 오토바이 운전자의 500m가 달랐을 뿐이다.

그렇게 교차로마다 헤매니 주문 접수 30분이 지나서야 죽집에 도착할 수밖에. “왜 이제 왔냐”고 타박하는 아주머니 탓에 맘이 더 급해지려는 찰나 콜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어디세요?” “바로 집 앞입니다. 다 왔어요.”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팅팅 불어 있을 죽과 화가 난 손님 얼굴이 떠올랐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는데 어라, 202동이 없다. 정문 보안 요원에게 물었더니 여기는 1차고, 2차는 저 너머에 있단다. 허겁지겁 경로검색을 해보니 한참 돌아가는 길만 나온다. 내비게이션은 자동차가 갈 수 있는 길만 알려준다. 어쩔 수 없다. 일방통행 길을 역으로 달리고 골목을 가로질렀다.

2차 아파트 단지 정문에 오토바이를 세웠다(강남 고급 아파트 단지는 오토바이를 단지 내로 들이지 않는다). 엘리베이터 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현빈처럼 쿨하게 “쏘리”라고 해볼까. 그러기엔 심장이 너무 쿵쾅거렸다.

“아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문을 연 아저씨의 첫 마디. 나 역시 수없이 뱉어 본 말이기에 야속하진 않았다. 이미 주문한 지 50분이 지났으니.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죄송합니다.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돈은 받으셔야죠’,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으니 괜찮습니다’ 이런 대화는 상상 속에서만 일어나는 것이었다. 죽값은 받아가라는 퉁명스런 말과 함께 1만원을 내밀더니 “잔돈은 됐다”며 문을 닫아버렸다.

손에는 만원짜리 한 장이 남았다. 죽값 8000원에 심부름값 7000원을 더한 1만5000원을 받아야 했다. 죽값을 빼니 2000원만 남는다. 본사에선 심부름값의 절반인 3500원을 가상계좌에서 빼갔을 테다. 한 시간 동안 일해서 1500원 손해 본 셈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리자 또 문자가 왔다. 이번엔 안경점에 가서 물건을 받아 고객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가려운 곳 긁어드려요

199번지에 가야 하는데 119번지에 갔다. 공교롭게도 안경점이 있다. 자신있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당최 당신은 누구냐는 시선이 위 아래로 쏟아진다.

“저기, 애니…맨…부르지 않으셨나…요?”, “예? 누구라구요?”

돌고 돌아 199번지 안경점에 도착하니 이미 다음 주문이 문자로 들어와 있다. 마음이 또 급해진다.

물건은 1회용 콘택트렌즈와 세정액이다. 배달 장소는 역삼동 오피스텔. 번지수 근처를 겨우 찾아갔더니 이번엔 건물 어디에도 번지수가 적혀 있지 않다. ‘강남대로 ○○○’. 새 주소만 떡하니 붙어 있다. 우여곡절 끝에 오피스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제야 윤 사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혼자 사는 여성들에게 배달할 때는 ‘집에 있는 재활용 쓰레기 있으면 내려가는 길에 버려드리겠습니다’라고 꼭 말씀하세요. 저희 업체만의 고객 서비스예요.”

조금이라도 귀찮을 것 같은 부분은 예리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이 바닥에선 그게 다 틈새시장이다. 엘리베이터에서 소리 내 연습했다.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여자다. 혼자 사는 게 분명하다.

“얼마죠?”

얼마였지? 머릿속엔 온통 ‘쓰레기 버려드릴까요’만 맴돈다. 더듬거리자 “4만원 맞죠?”하면서 5만원짜리 지폐를 준다. 거스름돈을 건네자 ‘쾅’, 문이 닫혔다. 쓰레기, 전단지, 아무 말도 못했다. “인상이 참 좋으시네요.” 취재원들에게 자주 듣던 말인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봤다. 찬 공기에 벌겋게 얼어버린 얼굴. 말라붙어버린 콧물, 빨갛게 충혈된 눈. 문을 열어준 게 다행이지 싶다.

진짜 심부름업체

잔심부름이라고 불리는 생활심부름업체들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대략 10년쯤 전부터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서울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강남의 모 업체조차 인터넷 홈페이지도 없고, 광고도 하지 않는다. 전국 서비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강남 지역만 서비스하기 때문에 알음알음 찾아오는 손님만 상대한다. 나머지는 사무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영세 업체들이 대다수다. 생긴 지 3년 된 ‘애니맨’은 강남에 있던 영세 업체들을 인수합병하면서 전국 서비스를 목표로 덩치를 키우고 있는 신진 업체다.

생활심부름은 강남 유흥주점 종사자들을 대상으로 담배 심부름 등을 해주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강남 일대에서 유독 견고하다. 1일 체험을 하는 고작 몇 시간 동안 목격한 동종업계 오토바이만 해도 서너 업체였다. 전체 주문의 80% 이상이 강남 지역에서 들어온다.

생활심부름은 퀵서비스와 유사하지만 좀 더 친근하고 세밀하다. 퀵서비스가 단지 ‘전달’에 초점을 맞춘다면 생활심부름은 ‘전달’에 ‘본인 대행’까지 한다. 유학 중인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초콜릿을 전달해 달라고 하면 초콜릿을 사고 쪽지까지 써서 전해주거나, 축구경기 표를 사기 위해 대신 줄을 선다거나, 정장 차려 입고 결혼식에 가 축의금을 대신 내주는 식이다. 윤 사장은 “일종의 ‘아바타’”라고 표현했다.

싱글족, 맞벌이족이 늘면서 생활심부름 수요는 계속 늘 것으로 보인다. 독거노인,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다면 공익사업이 되기도 한다. ‘애니맨’은 현재 서울 모 구청과 이 사업을 협의 중이다. 외국인을 위한 행정업무 대행도 생활심부름 영역이다.

배달맨의 숙명

콘택트렌즈 배달 후 강남대로에 있는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 빵 200개를 받아 코엑스지점으로 배달하던 중 휴대전화 배터리가 나갔다. 내비게이션 애플리케이션을 쉬지 않고 작동시켰더니 전력 소모가 많았던 모양이다. 서둘러 배달을 마치고 근처 가게 전화를 빌렸다.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되냐, KFC 햄버거 세트 배달 주문은 받았느냐…. 해도 해도 줄지 않는 집안일처럼 숨 돌릴 틈 없이 주문이 이어졌다. 배터리가 나갔으니 이번 주문은 다른 이에게 넘기고 일단 강남지점으로 가 휴대전화를 충전하기로 했다. 돌발 상황으로 인한 잠깐의 여유다(대신 KFC 배달에 나선 기사는 늦게 가지고 왔다는 이유로 손님에게 험한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충전하자 다시 문자가 들어왔다. 내비게이션을 쓰지 않고 사무실 벽에 붙은 강남지도로 위치를 확인했다. 진작 이랬어야 했다. 길을 알고 출발하니 마음이 편했다. 헤매지 않아 시간도 빨랐다. 디지털보다 아날로그가 편할 때도 있는 법이다.

가로수길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텐더 비프 2개를 포장해 역삼동 주점으로 가져가야 했다. 가는 길에 회사에서 또 전화가 왔다. 손님이 보챈다고 한다.

이번엔 길을 헤매지 않았다. 스쿠터를 몬 지 5시간. 이제는 운전이 익숙해 앞서가는 택시를 제칠 만큼 속도도 낸다.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분명했다. 배달 오토바이 선배들의 질주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패인은 차를 몰 듯 오토바이를 몬 데 있었다. 이런 식이다.

①방향이 틀렸다면 유턴할 수 있는 교차로를 찾을 때까지 계속 직진한다. ②빨간불일 땐 파란불이 들어올 때까지 하품이나 한다. ③꽉 막히는 도로에선 ‘강남은 역시 막히는군’하고 체념한다. 오토바이는, 특히 신속배달 오토바이는 그래선 안 된다. ①방향이 틀렸다면 가까운 횡단보도를 찾아 방향을 틀어야 한다. ②빨간불은 자동차용. 꼼지락꼼지락 쉼 없이 차량 사이를 비집고 나가 반드시 정지한 차량 대열 맨 앞에 서야 한다. ③길이 막히면 인도 위를 내달릴 것.

윤 사장이 피자 배달부 사망사고를 언급하며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수차례 당부했지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마음이 급했다. 유흥주점 앞에 가자 주점 직원이 밖에까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심부름의 이유

청주에 사는 여성이 오후 9시가 넘어 전화를 했다, 대뜸 “단감을 사서 삼성의료원에 전해 달라”고 했다, 눈이 많이 와서 오토바이 운행이 힘들다고 했지만 여성은 “어머니가 위를 덜어내는 대수술을 앞두고 있는데 ‘감이 먹고 싶다’고 하신다”며 하소연했다, 결국 배달된 그 감은 어머니가 맛본 마지막 단감이 됐다….

이번 겨울 이 회사에서 실제 있었다는 이런 ‘기막힌’ 심부름 기회는 잡지 못했다. 1일 오후 4시부터 7시간 동안 처리한 6건의 심부름은 음식 배달 3건, 1회용 콘택트렌즈 배달 2건, 약 사다주기 1건이다.

‘7000원씩이나 내고 왜 심부름을 시키는 걸까’란 의문에 “강남 사람들은 돈이 많으니 그렇겠지”라고 답한다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1년째 ‘심부름맨’을 하고 있는 김모(40)씨는 “부자들은 심부름 시키지 않는다. 고객은 대개 서민들”이라고 잘라 말했다. 실제 6건의 배달 중 오피스텔, 다세대주택 등으로의 배달이 3건이었다. 경제적 이유가 아닌 다른 답이 필요했다. 하나씩 따져보니 이랬다.

①죽. 가깝지만 걷기엔 애매한 거리에 죽집이 있다. 그렇다고 차를 가지고 가자니 꽤 길을 돌아가야 한다. 가게 앞에 마땅한 주차공간도 없다. 강남엔 도로마다 불법 주정차 단속용 CCTV가 즐비하다. ②샌드위치. 고급 유흥주점을 찾은 손님이 배가 고프다는데 싸구려 음식을 먹일 수 있나. 가로수길 고급 샌드위치를 손님 앞에 내놓고 싶은데 직접 다녀올 시간은 없다. 7000원만 보태면 가져다주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③1회용 콘택트렌즈. 한창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뿔싸, 렌즈가 없다. 화장도 안 한 채 부스스한 머리로 렌즈를 사러 강남 한복판을 쏘다니고 싶은 여성은 거의 없다. ④감기약. 전날 과음으로 감기몸살에 걸렸다. 집 근처 약국은 삼일절이라 문을 열지 않았다. 살고 있는 건물 1층에 편의점이 있지만 대한민국 편의점은 감기약을 팔지 않는다.

‘해야’ 하는데 ‘직접 할 수 없는 사정’은 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우린, 항상 조금씩은 귀찮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