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다피 용병 누구냐, 넌… 리비아 사태와 ‘아프라카인’
입력 2011-03-03 17:47
리비아 사태가 내전으로 치닫던 지난달 19일. 이집트 카이로 거리에서 울고 있던 리비아 여성이 CNN 카메라에 잡혔다. 그는 고향 친지들을 살려 달라며 외쳤다. “카다피가 아프리카인들을 동원해 리비아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
이튿날 트위터에는 ‘칼리드’란 ID로 “카다피의 아프리카 용병들(African mercenaries)이 집집마다 침입해 여자를 강간한다. 남자들이 시위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란 글이 올라왔다.
다시 이틀 뒤, 카다피에 반발해 사임한 알리 알 에사위 인도 주재 대사는 로이터통신에 용병의 정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아프리카에서 온, 아랍어 대신 불어를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분노는 무아마르 카다피를 향하고 있지만, 그것을 증폭시킨 건 ‘용병’의 등장이었다. 지난달 17일 벵가지에서 반정부시위가 본격화된 지 하루 만에 ‘아프리카 용병설(說)’이 시위대와 주민들 입을 타고,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통해 급속히 확산됐다.
“어떻게 외부세력을 시켜 동족을 죽이느냐.” 무스타파 압델 잘릴 법무장관 등 최측근도 이 대목에서 카다피에게 등을 돌렸고, 시위는 더욱 거세졌다. 시위진압용이라는 용병이 오히려 혁명의 동력이 된 셈이다.
그런데, 위 세 사람은 모두 용병을 ‘아프리카인’이라 불렀다. 리비아도 분명 아프리카에 있는데, 이들은 ‘아프리카인’이란 말로 용병을 자신과 구분하고 있다. 카다피의 용병, 이들이 말하는 아프리카인은 대체 누굴까.
시위대에 생포된 ‘용병’
시위대가 장악한 벵가지와 알 바이다에는 임시 감옥이 생겼다. 진압군과 교전 중 생포했다는 ‘아프리카 용병’이 벵가지에 20여명, 알 바이다에 200여명 갇혀 있다. 미국 주간지 타임, AP통신,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가 지난달 23, 25, 27일 각각 이들을 인터뷰했다.
알 바이다의 ‘감옥’은 아루바란 학교에 있다. 교실 바닥의 매트리스에 앉아 담요를 덮고 있는 포로들은 모두 흑인이었다. 접경국인 차드와 니제르 출신이 많고, 상당수는 리비아 시민권을 가진 이중국적자다. 일부는 리비아에 온 지 2∼3주밖에 안 됐다고 했고, 또 일부는 10대였다.
대부분 리비아 남부 사바에서 비행기에 태워져 알 바이다로 왔다. 사바는 카다피의 부족 카다파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다. 차드에서 양치기였다는 모하메드(16)도 그랬다.
“2주 전 일자리를 찾아 차드에서 사바로 왔다. 버스 정류장에서 어떤 남자가 트리폴리로 가서 일하지 않겠느냐며 비행기도 공짜로 태워준다고 했다. 그런데 비행기가 여기 알 바이다, 라브라크 공항에 내렸다… 난 무슨 일인지 몰랐다. 총싸움이 벌어졌을 때 정말 무서웠다.”
버스 정류장에서 모하메드에게 접근한 남자, 알리 오스만(30)은 옆 교실에 수감돼 있었다. 그는 카다피의 차남 사이프 알 이슬람이 주도하는 청년조직 멤버다. 인디펜던트는 오스만이 궁지에 몰린 상태여서 그의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알 수 없다고 했지만, 어쨌든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트리폴리의 친카다피 집회에 참석할 사람을 데려오라고 해서 저들(용병 포로) 중 일부를 내가 모았다. 나도 트리폴리에 가는 줄 알았는데 라브라크에 내렸고, 버스에 태워져 인근 군부대로 갔다. 거기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나눠줬다.”
용병 소문이 번져나간 지난달 18일, 알 바이다의 정부군이 속속 시위대 편으로 돌아섰다. 오스만 일행에게 총을 나눠준 군인들도 “시위대에 잡히면 너희는 죽는다. 도망가라”고 하곤 투항했다. 다음날 시내 법원 앞에서 주민들에게 붙잡힌 흑인 15명이 처형됐다.
타임은 “임시 감옥의 200여명은 스스로 운이 좋다고 여긴다. 사바에서 공수돼온 사람은 원래 320여명인데, 나머지는 생사를 알 수 없다. 감옥 경비원들은 포로를 감시한다기보다 성난 주민들로부터 보호하고 있었다. 기자가 갔을 때도 ‘용병 얼굴 좀 보자’며 주민들이 몰려왔다”고 전했다.
벵가지의 ‘감옥’은 법원 건물이다. 역시 바닥에 매트리스와 담요가 있고, 수감자는 대부분 흑인이다. 이들을 면담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의 피터 부카르트는 “용병이 아니라 혼란 속에 붙잡힌 이주노동자들이다. 시위대에 빨리 석방하라고 촉구했는데, 석방돼도 문제다. (검은 피부의) 저들을 그냥 거리로 내보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USA와 인종주의
카다피의 최종 목표는 ‘USA(United States of Africa·아프리카합중국)’ 건설이었다. 케냐에 본부를 둔 비영리국제기구 ICG(국제위기그룹)는 카다피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아프리카 정책’을 가진 유일한 아랍 지도자였다. 아프리카 통합 정부, 단일 화폐, 단일 군대, 단일 여권을 만들고, 자신이 그 대표자가 되려 했다.”
2008년 8월 29일 리비아 트리폴리에 아프리카 전역의 추장, 부족장 200여명이 모였다. 모잠비크, 코트디부아르, 콩고민주공화국 등에서 정치권력은 없지만 전통적 권위를 가진 이들이 참석했다. 여기서 카다피는 ‘아프리카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이란 칭호를 받는다.
이런 이벤트를 할 정도로 카다피는 ‘아프리카 왕’이 되고 싶어 했다. 미국 msnbc방송은 “카다피는 수십년간 ‘USA’ 구축을 위해 오일머니로 아프리카의 모든 정부, 군벌과 교류해 왔다”고 보도했다.
이에 리비아는 북아프리카 국가 중 사하라 남쪽 사람들의 이주에 가장 관대했다. 인구가 700만인데 일자리 찾아 온 흑인이 200만이다. 이들에겐 더 풍요로운 유럽으로 가는 길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관대함은 인종차별 문제를 촉발했다.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은 지난해 2월 “리비아는 흑인 이주노동자 차별을 철폐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뉴욕타임스도 비슷한 시기에 리비아의 인종 문제를 보도했다. “매일 아침 철도변이나 교차로마다 흑인 상대로 일당 8달러 인력시장이 열린다. 리비아인들은 일감을 빼앗겨 ‘아프리카인들이 싫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흑인들은 ‘여기서 우린 짐승이거나 노예’라고 한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달 22일 ‘카다피가 정말 리비아에 용병을 풀었을까?’란 기사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안보연구소(ISS) 이사카 수아레 선임연구원의 말을 인용했다.
“리비아에는 흑인이 많고, 멸시의 대상이며, 최하층민이다. 이들이 생계를 위해 오래전부터 카다피군에 입대했고, 시위진압에 투입됐다는 설명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카다피가 해외에서 용병을 공수했다면 최소 일주일은 걸렸을 텐데, 이번엔 시위가 터지자마자 용병 얘기가 나왔다.”
‘용병 시장’ 아프리카
카다피가 실제 해외에서 ‘정예’ 용병을 동원했을 가능성은 상존한다. 유엔의 ‘용병 이용에 관한 실무그룹’ 호세 루이스 델 프라도 위원장은 “최근 리비아의 언론인과 NGO(비정부단체)로부터 ‘카다피가 시위 진압을 위해 용병을 모집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알자지라방송은 “서아프리카에선 카다피의 계약금 2000달러 용병 모집 광고지를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보도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는 거대한 용병 시장이다. 서아프리카엔 전투 말곤 할 줄 아는 게 없는 인력이 너무 많다. 차드 말리 니제르 수단 등지의 내전은 값싼 용병들이 치른 것이다. 카다피는 이들과 꾸준히 교류해왔다. 리비아인들은 카다피가 남부 사막의 모처에서 용병을 양성해 왔다고 믿는다.”(델 프라도 위원장)
카다피가 아직 권좌를 지키는 게 잘 훈련되고 미리 준비된 용병 덕일 수 있다. 또는 알 바이다 감옥 수감자들처럼 일거리 찾아 온 노동자들이 인종주의에 ‘잔혹한 용병’으로 과장됐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혁명에선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이 제3의 피해자가 됐다.
리비아의 한 터키 건설업체 관계자는 BBC 인터뷰에서 “차드 출신 직원이 70∼80명 있었다. 상당수가 ‘카다피 용병’이라며 리비아인들의 칼에 살해됐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다.
태원준 기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