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8)] 쥐 잡으라고 풀어놓은 고양이 영화 상영중 “야~ 옹”

입력 2011-03-03 17:44


드디어 1996년 9월 13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전 7시50분, 부산 요트경기장에 마련한 5000석 야외상영장에서 생방송을 끝낸 뒤 9시부터 최종 점검회의를 열었습니다. 8월 29일부터 예매가 시작된 영화관람권은 예상을 뒤엎고 이미 5만장을 넘어서 우리를 열광케 했습니다. ‘뉴커런츠’ 부문에 선정된 아시아 신인감독들의 영화는 물론 단편과 다큐멘터리까지 고루 예매되고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개막영화 ‘비밀과 거짓말’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브렌다 블레신의 선상기자회견이 있었습니다. 요트나 유람선을 활용해 항구도시 부산의 이미지를 심어주려고 백방으로 주선했지만 결국 미포에서 연안부두를 왕래하는 일반여객선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추억에 남을 만했습니다. 저녁이 되면서 날씨가 흐려졌습니다. 불안했습니다. 우천에 대비해 5000석 좌석에 우비를 깔아 놓았습니다. 다행히 비는 뿌리다 멎었습니다.

저녁 6시50분, 부산 뉴필하모니오케스트라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연주가 수영만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배우 문성근과 아나운서 김연주의 사회로 역사적인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의 막이 올랐습니다.

문정수 부산시장의 개막선언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의 영상메시지가 상영됐고, 저는 개막영화와 함께 주연배우 브렌다 블레신과 마리안 장 밥티스트를 무대에 올려 소개했습니다.

이어 불꽃이 수영만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으면서 그동안 누워 있던 6층 높이의 대형스크린이 90도 각도로 서서히 올라갔습니다. 장내를 가득 메운 관중들의 탄성과 환호가 요트경기장을 뒤흔들었습니다. ‘드디어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는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대형 화면에서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국 마이크 리 감독의 ‘비밀과 거짓말’이 상영되고, 단하에선 성장(盛粧)을 한 김지미 신성일 안성기 장미희 강수연 심은하 등 국내외 스타들이 화려함을 더했습니다.

제1회 영화제에 31개국 169편

개막파티가 끝난 후 조선비치호텔에서 미포에 이르는 수많은 포장마차를 저는 밤새도록 순회하며 곳곳에 모여 있던 국내외 영화인들과 술잔을 나눴습니다. 한 포장마차에서는 비치파라솔을 바닷가 모래사장으로 옮겨 주요 외국손님들을 대접했습니다. 그곳에서만 80만원의 술값이 나왔습니다. 나는 카드로 계산하려 했지만 여주인은 ‘포장마차에서 카드로 결제하는 곳 봤느냐’면서 거절했습니다. 저는 ‘포장마차에 술 마시러 온 손님이 현금 80만원 갖고 다니는 것 봤느냐’고 맞섰습니다. 결국 포장마차 주인이 어디선가 카드결제기를 가져왔고, 이 일화는 두고두고 해운대에 회자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개막됐습니다.

13일부터 21일까지 9일간 계속된 영화제에서 31개국 169편의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이용관 프로그래머가 한국영화,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아시아영화, 전양준 프로그래머가 미주 및 유럽영화를 선정했습니다. 거의 모든 영화제의 집행위원장들은 수석프로그래머 역할을 겸하면서 직접 영화를 선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난 15년 동안 영화 선정에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개·폐막 영화조차 프로그래머들의 결정에 따랐습니다. 다만 그들이 선정한 영화가 배급사나 제작사 또는 심의기관이나 세관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는 일만 맡아왔습니다. 초청한 감독의 입국비자가 나오지 않을 때 재외공관을 통해 해결하는 일도 제 몫이었습니다.

유일한 경쟁 부문인 ‘뉴커런츠’ 부문에는 아시아 신인감독 13명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영화가 선 보였고, 임권택 감독이 위원장을 맡은 심사위원회는 중국 장민 감독의 ‘무산의 비구름’을 최우수 아시아신인작가상 수상작으로 선정했습니다.

영화 ‘패왕별희’를 갖고 첸카이거 감독이 중국에서 날아왔고, ‘마지막 황제’의 주연 여배우 조안 첸이 부산을 찾았습니다.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중국의 장 위안 감독은 막 제작을 끝낸 ‘동궁서궁’의 필름을 직접 들고 공항을 통해 입국했습니다. 영화제가 끝난 뒤 이 영화는 밴쿠버영화제에서 용호상을 받았지만 장 위안 감독은 중국 정부의 미움을 사서 3개월간 해외를 떠돌기도 했습니다. 정부의 허가 없이 만든 독립영화는 중국 정부가 불법으로 간주했기 때문입니다. 부산에서 첫선을 보인 임순례 감독의 ‘세 친구’와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부산영화제가 끝난 후 많은 영화제에서 초청받아 전 세계를 순회했습니다.

전국에서 18만4000명이 부산을 찾아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특히 10대와 20대의 젊은 세대가 관객의 90%를 차지해 부산을 찾은 외국영화인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세계에서 이렇게 젊고, 역동적인 영화제가 없다는 것이었죠. 첫 영화제로서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쥐에 물린 심사위원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숱한 화제와 일화를 남겼습니다. 저는 비(非)상업영화가 주류여서 관객동원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대중성 있고 재미있는 영화들을 야외에서 상영해 관객을 끌어 모은 다음, 그 열기를 남포동 극장가로 불어넣자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거금 1억5000만원을 투입해 스위스에서 대형스크린을 빌려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남포동 극장가는 초만원이었고, 야외상영장은 5000석 메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야외상영은 부산영화제의 명물이 됐습니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저는 개막식 연설을 가능한 한 없애기로 했습니다. 96년 5월 제49회 칸영화제도 주무장관이 참석했지만, 정부 측 인사 누구도 단상에 오르지 않았고 연설도 없었습니다. 개막파티에서도 연설은 물론 리셉션 라인에 호스트가 서있는 일조차 없었습니다. 동구권을 대표하는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는 체코의 하벨 대통령이 개막식에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했지만, 경호원도 없이 조용히 와서 2층 객석에 앉아 관람한 후 프라하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칸영화제의 50주년과 60주년 행사 때도 축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비교적 관료주의 성향이 짙은 베를린영화제나 도쿄영화제, 대만과 상하이영화제처럼 총리, 장관 또는 시장이 축사하는 영화제도 있기는 합니다.

저는 정치인들의 축사를 거절하는 방편으로 대통령의 축하영상메시지를 받아 개막식장에서 틀었습니다. ‘행정부 수반’ ‘국가원수’의 메시지라는 방패로 당시 참석했던 장관과 국회 상임위원장의 축사를 정중히 거절했고, 부산시장도 환영사 없이 개막선언만 하도록 설득했습니다. 대통령 영상메시지도 2회 영화제까지만 받고, 3회부터는 이것마저 사절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축사’ 없는 문화행사로 전통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선거가 있던 97년, 개막식에 당시 김대중 야당 후보가 참석하면서 소개와 축하인사 요청이 있었지만 저는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이회창 여당 후보가 남포동 야외무대를 찾았고 주변에서는 이 후보를 무대에 오르게 하도록 권유했지만, 오석근 사무국장이 눈물을 글썽이며 만류해 정치적 중립을 지켜낼 수 있었습니다.

처음 개최된 영화제였기에 시행착오도 많았고, 영사 사고도 적지 않았습니다. 단편 실험영화 ‘다우징’ 상영 때는 포커스가 나가 감독이 직접 영사실로 뛰어 올라가기도 했고, 장선우 감독의 ‘꽃잎’은 프린트가 거꾸로 돌아가 환불소동도 벌어졌습니다.

극장 환경이 열악했던 당시, ‘껌’과 ‘고양이’ 사건도 잊을 수 없는 일화입니다. 개막을 앞두고 극장화면을 점검하고자 객석 의자에 앉았던 문정수 시장의 바지에 껌이 달라붙어 관계 직원들이 혼쭐이 났습니다. 개막식 다음 날엔 영화를 심사하던 에리카 그레고르 여사가 쥐에 물려 비명을 지르기도 했습니다. 오 사무국장은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극장에 풀어 넣었는데, 영화 상영 도중에 고양이가 울어서 이번에는 쥐가 아닌 고양이를 잡으려고 자원봉사자들이 뛰어다니는 소동도 있었습니다.

9월 21일, 아시아신인작가상을 수상한 ‘무산의 비구름’이 상영되고, 폐막파티가 끝난 후 우리는 해가 솟아오를 때까지, 소주잔을 기울이며 흥분을 가누지 못했습니다. 남포동에서 해운대로 넘어가는 택시 안에서 뉴욕현대미술관의 랠리 카디시는 저에게 “네가 오라고 해서 와 봤더니 올 사람은 다 와 있고, 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없더라”고 축하인사를 전했습니다. 영화잡지 ‘버라이어티’는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예술과 대중적 성공을 모두 거뒀다’고 평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