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주철기 (3) 큰형 부도로 돈 잃었지만 우애 지켜내

입력 2011-03-02 18:14


우리 형제들은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이 동대문 근처라 동신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다. 아버님은 나의 서울중학교 입학시험 소집일에 나를 학교로 데려가시다가 다쳐 다리를 절게 되셨다. 만원버스에서 미처 못 내린 나를 부르며 버스를 따라 뛰시다가 다치셨다. 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버님은 또 큰 성냥공장을 인수하셨는데 여러 번 화재가 발생해 어려움을 겪으셨다. 거기에다 아버님은 성화여고 재단에 들어간 재산 환수 문제로 노심초사하셨다. 이는 결국 아버님이 1973년 돌아가시는 원인이 됐다. 갓 결혼해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던 큰형이 회사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도우려 내려갔지만 아버님의 크나큰 짐을 덜어주지 못했다. 어머님은 믿음의 여장부로 반석같이 의연한 분이셨지만 아버님 돌아가시고 2년 만에 작고하셨다.

나는 프랑스 연수 중에 돌아와 장례를 치러야 했다. 6형제는 남았지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이 늘 마음 아팠다. 이런 가운데 학교의 교장이었던 친척 어르신과 큰형 간에 재산 문제로 법정 소송까지 가게 됐다. 친척 간에 재산 관계로 싸움이 나니 집안끼리 대립하게 됐다.

큰형은 청년상공회의소장도 했었는데 분쟁이 계속되면서 교회 출석도 안 하게 됐다. 또 당시 분위기 속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해외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중부장로교회가 시작됐던 우리 집 사랑채 자리가 언제부터인지 대형 술 배달 유통 창고가 되어 있었다. 항의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못 꺼내고 속으로 애만 태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큰형이 미국에 나타났다. 재판에서 이겼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모든 것을 잃고 부도가 나 미국으로 피신해온 것이었다. 술에 찌들어 고통 받는 형의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후 형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친구의 안내로 기도원에 들어가 눈물로 회개하고 새사람의 길을 걸었다.

LA 흑인지역 시장 슈퍼의 종업원으로 시작해 교회를 섬기며 재기의 길을 걷는 것을 봤다. 미국에서 귀국하려 하자 국내에서는 내가 형을 빼돌렸다고 벼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아예 딴 나라로 전근 가라고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담담하게 귀국했다.

이후 형님 앞 연대보증으로 피해를 본 친척의 잇단 항의를 받았다. 나는 동생들과 협의해 급한 대로 자금을 모아 피해 가정에 전달하면서 급한 불을 껐다. 나 역시 몇 년 이상 대출금을 갚느라 고생했지만 집안 평화를 회복할 수 있었다.

큰형은 신앙의 연단기를 크게 겪고 현재 LA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현지 교회 안수집사로 오래 섬겼으며 온 가족이 예수를 잘 믿고 있다. 이런 과정 속에서 돈이 만사가 아님을 배웠다. 재산 때문에 형제나 친척 간에 싸우기보다 버리는 것이, 또 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며 평화의 길임을 배웠다. 형제 친척 간 갈등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녹아지는 것을 경험한 것이다.

현재 우리 형제들은 사업가와 교수, 변호사 등을 하면서 연단을 거쳐 살고 있다. 주위에서는 어머니의 하루 세 번 기도의 결과라고 한다.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