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세월, 겸손히 왕릉을 지켜왔구나… 뒤틀리고 굽은 채 대 이어 자리 지켜 온 ‘경주 도래솔’
입력 2011-03-02 17:25
봄비 젖은 천년의 솔밭에서 안개가 피어오른다. 새벽 기운을 머금어 더욱 푸르스름한 안개가 시나브로 솔밭을 점령한다. 뒤틀리고 굽은 기이한 모습의 도래솔이 창칼로 무장한 병사처럼 살아 꿈틀댄다. 오랜 세월에 걸쳐 대를 이어 왕릉을 지켜온 도래솔이 안개를 한지삼아 수묵화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순간이다.
무덤을 둘러싼 소나무를 도래솔이라고 한다. ‘도래’는 소나 염소의 고삐에 매단 둥그스름한 고리를 이르는 순 우리말. 그 모양에 빗대어 무덤가 소나무에 도래솔이라는 정겨운 이름이 붙었다. 태어날 때 금줄에 솔가지를 매달 만큼 소나무를 신성시하는 한민족은 죽어서도 우아한 자태와 고상한 기품의 도래솔에 둘러싸여 영원한 휴식을 취한 것이다.
천년고도 경주에서도 도래솔이 가장 멋스런 곳은 삼릉과 경애왕릉. 남산 서쪽 자락에 위치한 삼릉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재위 154∼184년), 제53대 신덕왕(재위 912∼917년), 제54대 경명왕(재위 917∼924년)의 왕릉으로 전해져 온다. 신덕왕과 경명왕은 부자지간이고 삼릉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잠든 제55대 경애왕(재위 924∼927년)은 경명왕의 아우.
삼릉의 도래솔은 ‘현대판 솔거’로 불리는 배병우 사진작가의 작품으로 인해 널리 알려졌다. 진흥왕 때 화가인 솔거는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老松圖)’에 새들이 앉으려다 부딪쳐 떨어졌다는 일화의 주인공. ‘카메라로 소나무를 그린다’는 배병우 작가의 소나무 사진이 2005년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가수 엘튼 존에 팔리자 촬영장소인 삼릉에는 요즘도 안개 낀 새벽에 사진작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삼릉의 도래솔 솔밭은 사계절 색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투박하고 거친 질감의 소나무 껍질 틈새에 눈이 쌓인 설경과 솔밭에 뿌리를 내린 진달래가 분홍색 꽃잎을 활짝 터뜨린 춘경은 삼릉의 사계를 대표한다. 그러나 이른 새벽에 자욱한 안개가 피어올라 한 폭의 수묵화로 변하는 솔밭만큼 감동적인 풍경은 없다. 운이 좋으면 영롱한 아침햇살이 솔밭으로 쏟아지는 빛내림 현상도 만날 수 있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삼릉과 돌다리로 연결된 솔밭의 도래솔들은 경애왕릉을 호위하듯 촘촘한 간격으로 둘러싸고 있다. 경애왕은 927년에 포석정에서 연회를 열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고 자살했다고 한다. 신라의 왕 중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셈이다. 그 때문일까. 경애왕릉의 도래솔 솔잎에는 안개로 만든 굵은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달려 있다.
삼릉 주변에서도 옛 35번국도 서쪽의 솔숲은 삼릉이나 경애왕릉의 도래솔처럼 촘촘하게 뿌리를 내리지 않아 여백미가 돋보인다. 이른 새벽에 짙은 안개가 피어오르면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은은한 흑백의 대비를 보이는 소나무들이 마치 무대에 선 발레리나의 춤처럼 몽환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남산을 사이에 두고 삼릉 반대편에 위치한 정강왕릉과 헌강왕릉은 소나무 진입로가 아름답다. 특히 소나무 뿌리가 그대로 드러난 정강왕릉의 오솔길은 강진 다산초당의 ‘뿌리의 길’에 버금갈 정도로 운치가 있어 산책하는 재미가 묻어난다. 신라 제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과 제50대 정강왕(재위 886∼887년)은 형제 사이로 얼키설키 엮인 도래솔의 뿌리를 통해 천년우애를 이어오고 있다.
해질녘 황금색으로 물드는 정강왕릉의 도래솔도 여느 도래솔과 마찬가지로 왕릉을 향해 절을 하듯 허리를 굽히고 있다. 가지도 왕릉을 향해 무성하게 뻗어 마치 신하가 왕을 향해 고개를 숙인 듯하다. 이는 양지식물인 소나무가 사방이 트여 햇빛을 받기 좋은 왕릉 쪽으로 자라기 때문이다.
낭산의 남쪽 능선에 자리한 선덕여왕릉의 도래솔도 왕릉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신라 제27대 왕이자 한반도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년)은 진평왕의 둘째딸로 국난을 극복하고 신라 문화를 꽃피웠던 인물. 신이 내린 숲이라 해서 신유림으로도 불리는 낭산의 소나무들은 선덕여왕을 기리는 백성들의 춤사위를 닮았다. 왕릉을 지키는 소나무라면 으레 금강송처럼 올곧아야 할 텐데 경주의 소나무들은 왜 꽈배기처럼 배배 꼬였을까.
학자들은 안강형 소나무로 불리는 경주 소나무의 특징을 신라인의 남벌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신라가 수많은 궁궐과 사찰을 짓고 숯을 사용하면서 잘생긴 소나무만 베어낸 탓에 열등 유전자를 가진 소나무만 살아남았다는 주장이다. ‘못난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대를 이어 왕릉을 지키고 있는 도래솔을 어찌 목재의 가치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구불구불하게 뒤틀린 소나무는 안강의 흥덕왕릉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낮에도 어두컴컴한 솔숲에는 수천 그루의 소나무가 빽빽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곳의 소나무들은 키가 작으면서 더 뒤틀려 기묘한 느낌을 준다. 어떤 도래솔은 뿌리는 다르지만 연리목처럼 서로 줄기를 맞대고 있다. 흥덕왕릉의 도래솔이 연인처럼 서로 뿌리와 줄기를 맞댄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년)은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장보고를 대사로 삼아 해상권을 장악했던 인물. 흥덕왕은 사랑하던 왕비가 죽자 새들도 짝을 잃고 혼자 슬퍼하다 죽는다며 재혼을 거부했다. 그리고 10년 후 세상을 떠나면서 왕비와 합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금강송처럼 올곧게 자라서는 서로 만날 수가 없듯 흥덕왕릉의 도래솔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서역인 모습의 무인석과 함께 천년의 사랑을 지키고 있다.
혹독한 추위에 더 당당하고 계절이 바뀌어도 푸른색을 잃지 않으며 척박한 땅에서도 꿋꿋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소나무는 한민족의 표상이다. 그래서 소나무는 예로부터 시나 그림의 소재로 사랑을 받아 왔고 암울했던 시절엔 희망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소나무에게 나무 중의 으뜸이라는 ‘솔’이라는 칭호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왕릉을 수호하는 경주 도래솔의 S자 곡선이 새벽안개와 만나 수묵화를 그리는 계절이다.
경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