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회개를 위한 외침2(정성진 목사)
입력 2011-03-01 12:42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 3:1~13)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지침으로 주신 십계명은 8개의 ‘하지 말라’는 계명과 2개의 ‘하라’는 계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고, 하라는 것을 하는 것을 순종(順從)이라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하고, 하라는 것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 것을 불순종(不順從)이라고 합니다. 이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닫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목사에게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라는 것은 가르쳤지만,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충성하는 것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 전체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이 책임은 대형교회 목사인 저 자신에게도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사로서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불순종의 모습이 수도 없이 많지만 대표적인 것 열 가지만 꼽아 보았습니다.
1. 사랑이 식었습니다(약 2:8).
2.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버렸습니다(고전 5:18).
3. 복음 전하라는 명령을 왜곡했습니다(행 1:8).
4. 거룩성을 잃어버렸습니다(레 11:45).
5. 창조질서를 지키지 못했습니다(창 1:28).
6. 명예를 탐했습니다(눅 14:11).
7. 재물을 섬겼습니다(마 6:24).
8.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신 6:7).
9. 나누지 못했습니다(마 19:21).
10. 회개하지 않습니다(마 4:17).
사랑의 하나님(요일 4:8)은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최고의 법을 지켜야 하는데 한국교회는 교단이 다르다고 정죄하고, 원수처럼 여기고 있으니 어찌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약 2:8)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죄를 짊어지시는 고통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들은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고후 5:18)
지옥에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들마다 이 말씀을 자기 교회를 채우는 데에만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왜곡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거룩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오늘날 교회를 거룩한 교회로 사모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싸우고, 시끄럽고,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이 가득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문화위임명령을 왜곡하여 창조 본연의 소명을 지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을 파괴하는데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그 결과 피조물들이 탄식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롬 8:22)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세상을 섬기고, 약한 자를 섬길 것을 가르쳐 주셨건만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가진 자 편에 서고, 권력의 편에 서고, 섬기기보다는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고, 명예를 탐하면서 총회장이 되고, 감독이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오늘의 한국교회가 되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자본주의에 빠져서 물질을 다스리지 못하고 물질 만능주의에 빠졌습니다. 큰 교회가 정답인 것처럼 생각하고 모두가 큰 교회를 지향합니다. 교회에서도 부자가 대접을 받습니다. 교회가 커지면 목사도 부유해집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물질은 유용한 것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더욱이 섬김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4)
이스라엘은 목숨을 걸고 율법을 가르쳐 2000년 유랑 중에도 민족혼을 지키고 다시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녀들에게 목숨 걸고 과외는 시키면서 성경은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 6:7)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해 질문한 청년에게 “네 재산을 나누어 주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뜻입니다. 신앙 좋은 장로나 권사들도 재산을 자식에게만 물려주지 세상에 환원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 19:21)
평양대부흥운동은 1907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던 중 선교사들과 교회지도자들이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줄을 서서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죄를 쏟아 놓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회개가 사라졌습니다. 회개 없이는 용서도 없고, 회복도 없고, 부흥도 없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도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처음 외친 말씀이 ‘회개하라.’였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 4:17)
앞에서 언급한 열 가지 중 자신에게 해당되는 불순종은 몇 가지나 됩니까? 우리는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우리의 신앙의 양심에 대해 가슴을 찢으며 회개하고 새롭게 신앙에 정진해야 합니다.
1. 불순종은 마귀의 속삭임이다강대국이 주변의 약소국을 다스릴 때 강온 전략을 구사합니다. 말을 잘 들으면 부드럽게 대합니다. 그러다가 말을 잘 듣지 않으면 강하게 압박을 해서 굴복하게 만듭니다. 지금 중국의 외교전략이 그러합니다. 요즈음은 북한에 대해 잘해 줍니다. 석유를 공급하고, 식량을 공급하고 많은 물자들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진항구를 50년간 쓰기로 협정을 맺었습니다. 이번엔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들을 개발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석유 공급을 3일만 중단하면 북한은 꼼짝 못하고 손을 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당근과 채찍전략’이라고 합니다. 이 방법의 고수는 마귀입니다. 마귀란 놈은 사람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 때 먼저 강압작전을 사용합니다. 자신의 강한 모습을 보여서 두려움에 떨게 만듭니다. 무서운 모습으로 나타나 꼼짝 못하게 합니다. 눈을 감고 벌벌 떨고 복종하게 만듭니다.
그와 반대로 변장하고 부드럽게 접근하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이 방법은 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유인할 때 사용합니다. 이 방법은 하와를 유혹할 때 성공을 거둔 후에 지금까지 계속 사용하는 상투적인 방법입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1-4)
사탄이 뱀을 입고 등장했습니다. 짐승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 뱀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입견을 버리고 생각해 봅시다. 뱀은 변온동물이라 환경에 따라 체온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체온에 따라 색깔도 변하는데 겨울에는 어둡고, 봄과 여름에는 밝은 색으로 아름답게 보입니다. 뱀이 물지 않고 독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뱀을 목에 칭칭 감고 있는 사람을 보셨지요? 뱀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 질문은 하와의 마음을 흔들러 의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과연 그럴까?’ 하고 하나님의 진실성을 의심케 할 목적으로 던진 미끼였습니다. 사단은 이간질에 능수능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만들어 하나님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합니다. 여기에 하와가 걸려들었습니다. 3절에 하와의 답변은 본래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엄격하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뱀에게 하나님께서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그 열매를 먹는 날에는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불만을 내비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또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셨는데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을 완화시킴으로써 금지규정의 절대성에 대해 의심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흔들리는 하와의 마음을 간파한 사탄은 즉시 “네가 그 열매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충동질을 했습니다.
사탄은 인간의 불만과 의심을 결코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을 서슴지 않고 내뱉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들어와 자신의 종으로 삼는 사탄의 고등전략입니다. 사탄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이러한 방법으로 유혹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거스르면서 ‘죄의 삯은 기쁨’이라고 우리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목숨 걸고 3차에 걸쳐 전도여행을 감행하여 세계 복음선교를 파종했습니다. 요즈음 목사들은 전도여행에서 ‘전도’를 빼고 ‘여행’을 하기에 목숨을 겁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전 세계를 여행전문가처럼 여행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금식하고 기도하며 문제의 산을 넘었습니다. 요즈음 신자들은 ‘금식(禁食)’에서 ‘금(禁)’자를 빼고 식도락으로 나섰습니다. 낮 시간 좋은 음식점엔 대부분 여자 손님들입니다. 간혹 남자 분들이 한 분 있으면 십중 팔구는 심방 중에 오신 목사인 경우로 보면 틀림없습니다. 교계의 모임을 호텔에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호텔이 회의도 하고, 음식도 먹고, 모이기에 편리하고, 주차도 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는데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그 비싼 음식 값을 개인이 지불하는 것이라면 과연 호텔에서 모일까요?
너무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말을 만든다고 하실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여행하면 시야도 넓어지고, 머리도 식힐 수 있는 점을 저라고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지나치면 미치지 못함만 못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탄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틈을 벌리면서 유혹하는 전술을 사용합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엡 5:6-7)
불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말씀을 두려움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마귀의 달콤한 속삭임을 분별하고 불순종에서 돌이켜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고, 그런 교회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2. 불순종은 하나님을 피하게 만든다자녀들을 키워 보신 분은 경험해 보셨을 겁니다. 어린 자녀들이 뭔가 잘못을 하면 부모님께 가까이 옵니까? 아니면 슬슬 피합니까? 아마 슬슬 피할 것입니다. 마음이 켕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개를 키워 보신 분들도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주인이 부르면 꼬리를 흔들고 반갑게 달려옵니까? 아니면 눈을 마주치치 못하고 옆으로 비실비실 걸어옵니까? 개도 자신이 잘못한 것을 알면 주인의 눈치를 보고 슬슬 피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불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피합니다. 교회에서도 시험에 든 사람은 앞자리에서 중간 자리로, 중간 자리에서 뒷자리로, 뒷자리에서 기둥 뒤로, 기둥 뒤에서 밖으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사람의 마음속에 거역하는 마음을 불어넣습니다. 그래서 불순종하게 만듭니다. 불순종한 사람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그때 마귀가 가까이 다가와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자기의 종으로 삼습니다.
사탄은 거짓말로 하와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행복해지고 높아질 것을 질투하고 두려워해서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한 것이니 먹어도 죽지 않는다.’라고 거짓말로 회유하자 하와의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전에는 보아도 특별한 느낌이 없었던 선악과가 갑자기 먹음직스럽고, 아름답게 보이고,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얼른 열매를 따 먹고는 남편을 불러 맛이 기가 막히다면서 주었습니다. 남자는 본래 여자의 말에 약한 법입니다. 결국 아담도 선악과를 함께 먹고 말았습니다. 그 즉시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말한 것 같이 행복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엉클어진 양심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창 3:5-11)
이전에는 벌거벗었어도 부끄럽지 않았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뒤에는 그것이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수치를 가렸습니다. 하나님이 오시는 기척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상태가 어떤 처지에 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용서를 빌면서 나무 사이에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아담을 부르신 것입니다.
아담이 대답하기를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담의 두려움은 벗은 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불순종 때문에 두려움이 임한 것입니다. 아담은 근본적인 문제를 자백하지 못하고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변명을 하면 부모들의 마음에 분이 솟아 올라옵니다. 그러면 한 대 때릴 것을 열 대 때리게 됩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회개할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사실을 시인하고 불순종 때문에 일어난 일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은 분명히 이전에 명령한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핑계하지 못하도록 불순종을 지적하셨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이 원죄가 되어 인류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떨어뜨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명령이 사소한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 하나의 불순종이 나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나 하나의 불순종이 가정을 파괴하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바라보는 아담과 하와의 눈은 정욕에 빠져 있었습니다. ‘먹음직하고’는 육신의 정욕을 말하고, ‘보암직하고’는 안목의 정욕을 말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고’는 이생의 자랑을 말합니다. 교회들이 너무 먹고 마시는 일에 에너지를 많이 쏟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종교를 보아도 금욕, 절제, 절식은 기본인데 그런 문화가 실종되고 있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위해 쾌락을 추구하고, 목사와 교인들이 성적 타락에서 자유롭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또한 마음의 성전보다 보이는 성전 건축에 너무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자랑거리를 만들기 위해 명예를 탐하고 그것을 위해 불법을 자행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지 오래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사 29:13)
우리가 피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하늘에서도, 바다에서도,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서둘러서 불순종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
3. 불순종은 책임을 전가한다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에 ‘안 되면 조상 탓, 잘되면 내 탓’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악습이 있습니다.
1989년 천주교평신도협의회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펼쳤습니다. 차량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습니다. 이 운동은 사회 전역으로 번지면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프로이드의 심리학에서 ‘내 탓이오’라고 하는 경우를 ‘투입(投入)’이라는 말로 설명했습니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문제를 밖으로 돌리지 않고 안으로 돌리는 것 즉, 대상은 밖에 있는데 그 문제의 답을 내부에서 찾는 것을 말합니다. 프로이드는 지나치게 ‘내 탓이오’라고 하는 경우 우울증을 앓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 탓이오.’라고 말하기보다는 ‘네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더 건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탓’이라고 문제를 남에게 돌리면 육신은 건강할지 모르지만 죄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방법은 ‘네 탓이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어려운 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회개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했기 때문입니다. 그 슬픈 유전자가 우리의 DNA 속에 잠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네가 먹었느냐?’고 질책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담이 “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회개했어야 했는데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원망을 퍼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그런 여자를 내게 주셨습니까? 그 여자가 선악과를 제게 주어서 먹었을 뿐입니다.” 파혼의 책임을 중매쟁이에게 돌리는 것 같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13)
아담은 하나님을 죄의 공범자로 끌어들일 뿐 아니라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사랑의 세레나데까지 바쳤던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불순종한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기가 막히셔서 아담하고 얘기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시고는 하와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하와는 “뱀이 나를 꾀는 바람에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하고 뱀에게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회개를 바라시며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절망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아름다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와르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뱀이 선악과를 먹도록 유혹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입에 넣은 것은 아닙니다. 선악과를 따서 먹은 것은 하와와 아담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불순종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곁에 오셔서 회개를 촉구하실 때 즉시 자복하고 회개하면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불순종과 책임전가의 DNA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우리들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먹음직한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고, 보암직한 안목의 정욕의 지배를 받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이생의 자랑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기를 밥 먹듯 하고 살아갑니다.
불의한 방법을 쓰면서도 합리화하고, 부정부패에 물들어 살아가면서도 그렇지 않고는 세상을 살 수 없다고, 남들도 다 그렇다고 세상에 책임을 떠넘깁니다. 구구한 변명과 책임회피와 책임전가를 하면서도 자신은 떳떳하기만 합니다. 그 결과는 두려운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아담과 하와의 경우를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첫째는 사망의 저주였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창 3:19) 둘째로 뱀은 배로 기어 다니고, 여자는 임신의 고통을 당하고, 남자는 땀을 흘리고 평생 수고하며 살아야 하는 저주를 내리셨습니다.(창3:14-17 ) 그에 그치지 않고 낙원인 에덴동산으로부터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셨습니다.(창 3:24)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불순종하면 아담과 하와와 같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불순종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명예를 탐하고, 섬기지 않고, 대접 받기를 좋아한 일, 돈을 사랑하여 물질만능주의로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돈을 뿌리며 교단 총회장, 한기총 회장, 감독 선거에 임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밥 좀 사 준 것이 죄냐고 합리화하면 안 됩니다. 우리나라의 공직자 선거에서는 50배의 벌금과 당선무효가 되는 엄격한 법이 있는데 교회의 도덕 수준이 세상만도 못하니 무슨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겠습니까?
사울도 불순종했습니다. 다윗도 불순종했습니다. 다윗이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회개하지 않고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했다가 망했고, 다윗은 즉시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하여 용서받았습니다. 요나는 불순종의 대명사가 되었지만 회개하여 구원받고 선지자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서 깨어 있는 성도라면 “네! 제가 불순종의 자리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교회와 가정과 사회의 죄를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정성진 목사(거룩한빛광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