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에 너덜너덜… ‘때묻은 태극기市’
입력 2011-02-28 22:32
3·1절 92주년… 전국 첫 ‘태극기도시’ 구리시 가보니…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태극기의 도시’를 자처한 경기도 구리시에는 찌든 때가 얼룩진 태극기, 비에 젖어 깃대에 뒤엉킨 태극기들이 걸려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의 전시행정이 태극기 훼손을 초래하고, 주민의 자발적인 국기 사랑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리시 교문동 A아파트와 B아파트는 시가 집집마다 태극기를 연중 달도록 유도한 시범아파트다. 전체 2개동 330가구로 이뤄진 A아파트에는 50여가구를 제외한 모든 집에 태극기가 게양돼 있다. 도로 건너의 B아파트 역시 전체 2개동 316가구 가운데 260여가구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이들 아파트의 태극기 상태는 심각했다. 일부 태극기는 지난 27일 내린 비로 축축해져 깃대에 뒤엉켜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펄럭이지 않았다. 베란다 난간에 태극기가 끼어 꼬여 있거나 에어컨 전선과 엉켜 있는 태극기도 있었다. 때가 묻어 얼룩진 태극기, 가장자리 부분이 해져 실밥이 나와 있는 태극기도 보였다.
구리시는 지난해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전국 지자체 중 처음으로 ‘태극기 도시’를 선포했다. 국경일 전후 5일간 전 가정 태극기 달기, 태극기 홍보관 운영, 태극기 달기 시범아파트 운영 등을 추진해 지난해 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취지는 좋지만 이벤트식 정책 추진에 불만을 토로하는 주민이 적지 않았다. B아파트 주민 이모(55·여)씨는 “관리하기 귀찮지만 위에서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이라며 “시에서 하는 건지, 동에서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A아파트 관리사무소가 가구마다 태극기를 설치하며 깃대를 난간에서 분리할 수 없도록 볼트로 고정해 놓아 사고 위험까지 있었다. 주민 김모(61·여)씨는 “때가 탄 태극기를 보면 빨고 싶은데, 고층 가구의 경우 난간에 매달려 태극기를 푸는 게 위험해 그냥 놔두고 있다”고 했다.
구리시가 태극기를 24시간 365일 게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것은 ‘국기가 심한 눈, 비, 바람 등으로 훼손돼 존엄성이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게양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한 대한민국 국기법 8조 5항 위반이라는 지적도 있다. 주민 박모(38)씨는 “눈과 비를 맞고 걸려 있는 태극기를 볼 때면 전시행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구리시 관계자는 “시내 태극기광장에 있는 태극기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교체한다”면서 “그러나 도로 쪽은 도로 관련 부서가, 아파트는 주민이 자체적으로 관리를 맡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리=김수현 기자 siemp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