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운동의 성지 프랑크푸르트 바울교회… 청동판에 박제된 슈페너 그래도 독일교회의 심장

입력 2011-02-28 17:38


당혹스러웠다. 세계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지였던 독일 프랑크푸르트 바울교회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나 평양대부흥운동의 발원지인 평양 장대현교회 같은 역사적 장소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른 탓일까. ‘제2의 종교개혁자’ ‘경건주의의 아버지’ 필립 야콥 슈페너(1635∼1705)를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나인(Nein, 아니오)’이란 대답만 돌아왔다.

교회에 들어서자 1층 전시관이 눈에 들어왔다. 12개의 홍보패널이 설치돼 있었는데 1849년 첫 번째 독일 국회가 열렸던 장소였기에 정치적 기념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는 소개가 있었다. 관광객이라곤 4∼5명이 전부였다.

2층 예배당으로 올라갔다. 원형 예배당인데 강단 정면에 파이프오르간이 붙어 있었다. 세미나용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벽면에 독일 연방 국기가 꽂혀 있었다. 널찍한 돔 형태의 예배당은 1944년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지붕 전체가 파괴됐으며, 1948년 복구된 이후 더 이상 예배가 드려지지 않고 있다. 건물을 관리하는 클라우스씨는 “이곳은 교회가 아니기 때문에 현재 예배가 없으며 기념관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면서 “슈페너라는 사람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나마 교회 외벽에 붙어 있는 청동판이 300여년 전 이곳이 경건주의 운동의 시발점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필립 야콥 슈페너-교회개혁가이자 사회개혁가, 1666년부터 1686년까지 프랑크푸르트 루터교 목사들의 대표자였으며, 프랑크푸르트 최초의 빈민의 집, 아르바이트 하우스(빈민 재교육 및 구호시설), 고아들의 집 창립자였으며, <경건한 열망>의 저자.’

슈페너가 활동하던 17세기 독일교회는 21세기 한국교회 못지않게 내적으로 종교적 형식화와 외적으론 세속화, 인본주의 사상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다. 특히 독일교회는 종교개혁 후 100년도 채 안돼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너무 편협하게 받아들인 결과 ‘신앙=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라는 잘못된 등식에 빠져 있었다. 칭의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중생을 통한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복음의 교리를 배제시켰고, 교리가 거룩한 삶을 대체하는 기형적 현상이 나타났다.

슈페너는 교리 속에 갇힌 복음의 생명력을 회복하고 교회의 부패와 무능력함을 치유하기 위해 교회 갱신의 핵심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식과 실천에서 조화를 강조한 슈페너의 경건주의는 영국 웨슬리와 휘트필드가 펼친 대각성운동의 원동력이 됐으며, 여전히 독일교회를 이끄는 힘이다.

슈페너가 20년간 누볐던 뢰머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바울교회와 길 하나 사이를 두고 있다. 가랑비를 맞으며 30여명이 정부의 저소득층 주택보조 정책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 680년쯤 건립된 성 바돌로매제 대성당이 있는데 300명이 넘는 관광객이 있었다. 대성당은 지금도 미사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뢰머 광장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관광정보센터로 들어갔다. 바울교회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싶다고 하자 5유로(한화 7750원)짜리 책자를 내밀었다. 책자도 건축양식과 의회에 관한 것이었다. 추가 설명을 부탁하자 센터직원은 “바울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 슈페너라는 사람은 잘 모르니 그쪽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광장에선 거리악사가 아코디언으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즉석 연주하고 샴페인 잔을 든 서너 명의 청년들이 그걸 즐기고 있었다. 한국교회가 다음 세대에 신앙전수를 게을리 하고 교회사를 가르치지 않는다면 부흥의 현장이 관광코스로 전락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크푸르트=글·사진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