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중동 반정부시위, 칼빈신학으로 보기

입력 2011-02-28 13:52


최근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 운동 혹은 반정부 운동이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 결과가 미칠 서방 세계와의 관계 변화도 바쁘게 분석되고 있다. 신앙적으로는 중동의 변화가 선교와 기독교 세계에 유익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분분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리스도인들의 국가관을 역사적으로 짚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잠시 돌아보면, 국가에 대한 기독교인의 태도는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라 교회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로마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와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 그리고 기독교 제국이었던 로마가 멸망한 이후의 역사적 상황은 기독교인들에게 과연 국가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도록 했다. 그 이후 중세에는 하나의 기독교 세계 안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전체 중세를 지배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국가가 하나로 통합되어 있던 중세 말 상황 속에서 16세기 초 성경적인 신앙이 재발견되면서 당장 떠오른 화두는 국가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신학적 질문이었다.

칼빈이 택한 제3의 길
칼빈이 살았던 16세기 초 유럽의 국가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서로 묶여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나 프랑스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왕에게 모든 권력을 주셨다는 신념을 가지고 심지어 국민들의 신앙도 국가가 강제로 결정했다. 백성들은 단지 이런 국가에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성경에 기초한 신앙을 재발견한 종교개혁주의자들은 국가가 성경에서 벗어난 신앙을 강요할 때 그 압제 밑에서 순교하거나 아니면 정든 고향을 버리고 국외로 떠났다. 칼빈 자신도 그런 난민 가운데 하나다. 그는 프랑스인이었지만 스위스 제네바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러면 칼빈은 국가의 권위 자체를 거부했을까? 그것은 아니다. 칼빈은 성경에 근거한 제3의 길을 택했다. 한편으로 칼빈은 국가와 교회의 강력한 결합을 주장했던 로마 가톨릭을 반대했다. 그러나 칼빈은 동시에 국가를 거부하던 급진 종교개혁도 비판했다. 칼빈의 주장은 국가는 하나님이 국가에 부여하신 고유한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에 대한 신학적인 기초
루터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면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칼빈에게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무대였다. 하나님은 구속의 주로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창조주로서 온 우주를 다스리신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있는 영역은 없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통치하기 위해서 두 개의 정부(government)를 세우셨다. 영적인 세계를 통치하는 ‘교회’와 육적인 세계를 다스리는 ‘국가’가 그것이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신적인 기관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다.

칼빈에 의하면 이 국가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사회의 평화와 안녕을 유지하는 것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존엄성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은 국가를 세우셨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두 개의 정부, 즉 교회와 국가의 통치를 받으면서 산다. 칼빈은 국가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급진적인 종교개혁주의자들의 견해였다. 그렇다고 칼빈은 국가의 권위를 절대화하지 않았다. 국가와 교회를 결합하여 신성화한 것은 로마 가톨릭의 입장이었다. 칼빈과 그를 따르는 개혁주의는 구별(distinction)이라는 용어를 선호했다. 즉 교회는 교회의 역할이 있고 국가 또한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국가 고유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국가의 통치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된 자들이다. 그들은 국가가 평화를 보존하고 국민의 존엄성을 잘 지키도록 사명을 위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위정자는 국민 위에 절대적 권력으로 군림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국가에 불순종할 경우
앞에서 살펴본 칼빈의 신학에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인 국가에 순종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가 그 본래적인 사명인 사회의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을 보호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할 수 있도록 국가에 적극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신적인 기관이라서 거기에 순종해야 한다면, 만약 국가가 위임 받은 본래적 임무에서 이탈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즉 국가가 평화를 깨뜨리고 국민의 존엄성을 해치게 되는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칼빈은 그런 국가는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되는 정부가 아니라는 뉘앙스를 점차 강화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순종”을 강조한다. 불의한 정부에 대한 순종의 여부는 신앙의 문제가 된다. 물론 칼빈은 국가에 대한 저항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불의한 정부에 대한 불복종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따라서 이 문제는 칼빈의 후예들에게 넘겨졌다. 칼빈의 신학을 수용했던 네덜란드나 스코틀랜드를 보라. 그들은 칼빈의 신학을 더 강조해서 국민적인 저항을 했다. 네덜란드는 결국 신성로마제국에서 독립을 쟁취했다. 이런 사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는 3·1운동에 참여했던 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서도 발견된다. 그뿐 아니라 당시로서는 국가적인 정책이었던 ‘신사참배’를 반대하면서 국가에 저항했던 소수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컨대 칼빈이 말하는 국가는 하나님에 의해서 수립된 기관이다. 위정자는 하나님이 국가에 맡기신 일을 담당하는 자들이다. 그것은 평화를 유지하고 국민을 보호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것이다. 이런 국가에 순종하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자세다. 그러나 국가가 그 본래적인 사명을 벗어났다면 그 국가는 더 이상 하나님의 위임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불복종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근의 중동 지역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먼저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이들 정부가 얼마나 평화를 유지하며 국민의 존엄성을 지켜왔는가? 만약 그렇게 해 왔다면 국민들은 이 정부에 순종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칼빈의 신학을 따르면 불의한 정부는 더 이상 하나님에 의해서 인정되는 정부가 아니다. 따라서 칼빈은 이 경우 불의한 정부에 대한 불복종의 가능성을 닫아놓지는 않았다.

물론 최근 중동의 민주화 문제를 바라보면서 염려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이 사태가 급진적으로 발전하여 이슬람 혁명과 같은 노선을 취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칼빈의 신학에 근거한다면 이슬람의 신정적인 정부는 16세기의 로마 가톨릭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위임하신 그 본래의 역할을 상실한 그 어떤 정부나 위정자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합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안인섭 교수(총신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