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형의 ‘문화재 속으로’] (57) 7000년 전 멧돼지 그림

입력 2011-02-27 17:34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확인된 동물 그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무엇일까요. 2005년 경남 창녕 비봉리의 신석기시대 패총(貝塚·조개무덤)에서 발견된 7000년 전의 멧돼지 그림이랍니다. 창녕비봉리패총(사적 486호)은 내륙지방에서 발굴된 최초의 신석기시대 패총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와 망태기 등이 쏟아져 나와 고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 가운데 세 조각으로 깨진 상태의 토기에 그려진 동물은 선각(線刻·선을 그어 새김)한 것으로 네 발 짐승을 묘사하고 있답니다. 형태는 물고기에 가까우나 등쪽에 돌기가 나 있고, 머리쪽에는 눈 또는 코를 나타내는 두 개의 점이 찍혀 있으며, 몸체에는 얕은 문살 무늬가 그려져 있는 모습이 멧돼지를 닮았다는 겁니다. 함께 출토된 멧돼지뼈가 그 근거라 할 수 있겠죠.

이 그림은 1999년 부산 동삼동에서 출토된 5000년 전 사슴 그림보다 2000년이나 앞선 것으로 한반도 최고(最古)의 동물 그림으로 기록됐습니다. 그렇다면 선사시대에 숱한 동물 중에서 왜 멧돼지 그림을 그렸을까요. 멧돼지는 예로부터 수렵생활의 주요 대상 중 하나였답니다. 멧돼지의 고기는 식량으로도 공급되고 송곳니 등은 장식품이나 도구로 사용됐다는군요.

2002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 고남리 패총에서 발견된 동물뼈 가운데 사슴과 멧돼지가 대부분인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 멧돼지는 인간에게 아주 유용한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합니다. 선사시대에 동물 그림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주술적인 이유 때문으로 고고인류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동물 그림을 통해 그 동물이 많이 잡히기를 기원한다는 것이죠.

멧돼지 그림으로는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신석기 말에서 청동기시대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로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지요. 이 가운데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 45점으로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했답니다.

백제시대의 찬란한 문화를 대표하는 금동대향로(국보 287호)에도 멧돼지가 등장합니다. 향로의 뚜껑에는 39마리의 동물이 새겨져 있는데 호랑이 코끼리 사슴 등과 함께 멧돼지가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요. 1∼3세기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경남 김해 봉황동 유적(사적 2호)에서도 멧돼지뼈가 나오는 등 멧돼지는 문화유산의 한 부분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셈이죠.

겨우내 움츠렸던 멧돼지가 여기저기 출몰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12∼1월이 번식기인 멧돼지는 춥고 눈이 많이 오면 야산으로 내려오는 습성을 지녔다는군요. 주택가에 멧돼지가 나타나 소동을 벌이는 일이 잦아지고 얼마 전에는 백담사 경내에서 어슬렁거리기도 했답니다. 오래 전 인간의 삶과 함께 했던 멧돼지가 횡포나 부리는 경계의 동물로 변해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화과학부 선임기자 이광형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