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이화련] 지키지 못한 약속
입력 2011-02-24 17:58
내가 좋아하는 수필 중에 목성균의 ‘약속’이 있다.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다. 지키지 못한 언약에 대한 가슴 저린 회한이다.
산림 공무원이던 그가 영림서에 근무할 때 박지산 고원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화전민 오두막에서 할아버지와 사는 어린 소년은 작업을 끝내고 산을 내려가는 그를 막아선다. 오두막에서 함께 며칠 지내는 동안 정이 들었던 것이다. 눈보라치는 겨울 산정에서 동무도 없이 겨울을 나야 할 아이를 두고 그도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길을 막는 소년에게 그는 산불조심 완장을 채워주고 호각을 목에 걸어주며 약속한다. 내년 봄에 꼭 다시 오겠다고.
그러나 갑자기 근무지가 바뀌고, ‘새 근무지에서 말단 공무원의 직무와 그 박봉으로 삼남매를 기르느라 여념이 없어’ 그는 소년을 까맣게 잊는다. 30년이 흐른 뒤, 여름 휴가지의 숲에서 여섯 살짜리 손자 승주를 업고 별을 보다 문득 그 소년을 생각한다. 뒤늦게 박지산으로 가 수소문하지만 소식을 알 길이 없다. 산마을 사람들이 나물을 뜯으러 갈 때마다 소년이 호각을 불며 달려왔다 시무룩해하더라는 말만 전해 듣는다. 그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되뇐다. 그 심정을, ‘마치 승주를 그 산정에 남겨 두고 온 듯한 착각에 목이 메어오는 것이었다’고 썼다.
지키지 못한 약속은 또 있다. 목성균의 약속을 손자가 일깨웠다면 내 옛 약속은 아들이 되살려 놓았다. 원주의 부대에 있는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첫 면회였다. 이제 막 이등병 계급장을 단 아들은 머리가 짧아 그런지 고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 같았다. 어쩐지 풀이 죽은 것 같고 어딘지 아픈 데가 있는 것처럼 보이던 그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는데 그 얼굴 위에 불현듯 또 하나의 얼굴이 겹쳤다.
그도 그때 이등병이었다. 나보다 두 살쯤 아래였고 지금의 아들보다 더 어린 나이였다. 나는 그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고 지키지 않았다. 그가 연거푸 편지를 보내와도 답장하지 않았다. 첫 휴가에 그가 나를 찾아왔지만 친절하게 대해 주지 않았다. 야윈 듯 군복이 헐렁한 그를 앞에 두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편지를 쓰느냐며 짜증을 부렸다. 그는 모자를 눌러쓰고 돌아섰다. 고개를 수그리고 걸어갔다.
나는 왜 그리도 야박했을까. 제대할 때까지만, 아니 일등병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따뜻하게 대해 줄 걸, 편지도 쓰고 가끔 면회도 가 줄 걸…. 가뜩이나 고된 군대 생활에서 그의 신병 시절은 얼마나 어두웠을까. 어린 마음에 섭섭함을 삼키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그 옛날의 그가 아들만큼 앳되고 아들처럼 안쓰러운 모습으로 떠올랐다. 원주에 두고 온 아들이 마치 그 사람인 듯 마음이 아팠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담이 결리듯, 무엇이 찌르는 듯, 숨을 쉬기 어렵게 아팠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그 벌은 천천히 다가올 수도 있다. 30년 혹은 40년 후, 가슴 찌르는 아픔으로 찾아올 수도 있다.
이화련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