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 역사도 우리 옛 그림 속에 다 있네…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입력 2011-02-24 17:54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정민 외 26인/태학사
인문학 열풍을 타고 한국학도 새삼 주목받고 있다. 아니, 인문학 열기의 핵심이 한국학이라 해도 좋을 터. 지리, 미술, 음악, 문학, 연극…. 여러 분야의 연구층이 활발한 대화를 나누며 한국학의 지평도 차츰 넓어졌다. 시기로는 신라시대부터 구한말까지 아우르는 역사 곳곳의 이야기들을 국학 계간지 ‘문헌과 해석’에 관여했던 인문학자 27명이 모아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태학사)로 펴냈다. 옛 그림이나 유물,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학 입문서로도 손색 없는 대중서다.
예사롭게 지나갈 소재도 국학자에겐 훌륭한 이야기거리가 된다. 요즘에는 겨울마다 수량이 넘쳐 처치곤란한 귤은 조선시대엔 왕에게 바치는 진상품이었다. 정조는 역대 군주 중에서도 귤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아프면 귤차를 끓여 올렸고, 신하들에게 ‘귤책(橘策)’이라는 책문을 쓰게 하기도 했단다. 어떤 모양의 잔인지는 미상이지만, 신하들에게 귤껍질로 만든 술잔을 종종 하사했다. 정조 자신도 향귤차(香橘茶)를 자주 마셨다고 한다. 귤을 바치는 제주 대정현·정의현 백성들에게 그가 내린 글이 남아 있다. “너희들은 내가 너희를 멀리한다고 하지만 멀리 있어도 나의 백성이요 가까이 있어도 나의 백성이다. 귤이 소반에 올라오면 너희들이 고생스럽게 재배했음을 떠올리고, 말이 궁궐 뜰에 들어오면 너희들이 분주하게 길렀음을 생각한다”(111쪽) 그러나 민간의 귤나무에 손을 뻗치는 관(官)의 횡포에, 백성들은 왕의 글에 감동하기보다 집 앞의 나무를 베는 쪽을 택했던 모양이다.
쓴웃음이 나오는 사연도 있다. 명(明)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유품인 현금(弦琴) ‘숭정금’은 조선에 있었다. 조선에 오게 된 이유가 재미있다. 원래 소유자는 청대 한족 관리였던 손형이었는데, 명대의 유물을 관리하다 오해받는 게 싫어 벗 박제가에게 준 것이다. 손형은 애물단지를 처리한 것일지 몰라도 명의 유민임을 자처했던 조선 사대부들은 이 현금을 비할 바 없이 귀하게 여겼다. 박제가는 병자호란 당시 청에서 죽은 삼학사 윤집의 후손 윤행임에게 현금을 주었다. 윤씨 일가는 오랫동안 숭정금의 주인이었고, 잠시 숭정금을 보관한 적 있는 김정희는 윤행임의 아들 윤정현에게 ‘숭정금을 보관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숭정금실’(崇禎琴室) 현판을 써 주기도 했다. 이들과 친했던 양반들도 숭정금의 유래를 노래한 시를 앞다퉈 지었다. ‘명나라 유민’인 양반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한 이 보물도 지금은 소실됐다.
고금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듯 이 책에 실린 그림들 역시 ‘읽기’가 중요하다. 유배지 강진에 있으면서 아내가 보내준 치마에 그림과 시를 적어 자식들에게 보낸 정약용의 ‘매조도’, 17세의 선조에게 68세의 이황이 올린 ‘성학십도’의 뒷이야기를 알고 나면 두 학자의 안타까운 심정이 손에 잡힐 듯 생생히 전해진다. 두 장의 전투화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壯襄公征討詩箋剖胡圖)’와 ‘파진대적도(擺陳對敵圖)’를 통해서는 임진왜란을 전후로 한 조선군의 변화를 읽어냈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에서는 거문고가 유행했던 당시 사대부들의 ‘풍류 레퍼토리’를, 서양식 정장을 입은 박영효의 사진에서는 물밀 듯 들이닥치는 근대의 조류에 구한말 사람들이 겪었을 정신적 충격을 본다. 예술과 역사가 서로 넘나들고, 정치와 정서가 뒤섞인다. 국학 연구에서 통섭과 융합이 중요한 까닭이기도 할 것이다.
27명의 학자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다. 이 작업은 꽤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군데군데 충분히 삽입된 각종 도판과 국학 문외한들을 배려한 세심한 설명이, 교양으로 역사를 즐기는 이들 뿐 아니라 처음 한국학 책을 집어드는 사람들에게도 충분하다. 고전의 한문 원전과 친하지 않은 사람들이 읽기에 전혀 어려움이 없다. 분량이 500여쪽에 달하지만 지치지도 않는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