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7)] 영화제 개막 코 앞인데 “공륜 심의부터 받아라”
입력 2011-02-24 18:07
조직위원회가 정식 출범한 뒤 당면한 최대 과제는 돈을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소요 예산은 10억, 14억, 17억원… 계속 늘어나는데 가용 예산은 전무했습니다. 이용관 김지석은 교수 봉급을, 저는 ‘마이 티브이’에서 나오는 급여를 다 털어 넣어도 모자랐습니다.
파라다이스호텔에서 약속했던 5억원이 물거품된 후 부산시를 끌어들였지만 부산시의 지원은 최종 단계에서 3억원으로 확정됐습니다. 그나마 2억원은 6월 15일에, 나머지 1억원은 7월 9일에야 배정됐죠. 보다 못한 오세민 정무부시장은 은행에서 5000만원을 신용대출받아 빌려줬습니다. 그 당시 5000만원은 엄청난 자금이었죠.
돈 구하는 일은 결국 제 역할이었습니다. 5월 22일 오전 11시, 박광수 부위원장과 함께 대우개발의 정희자 회장을 만났습니다. 김우중 회장은 고교 동기였고, 부인인 정희자 여사는 제가 공연윤리위원장일 때 ‘윤리위원’으로 위촉해 영화 심의를 맡게 한 적이 있어 잘 아는 사이였죠. 제안 설명을 들은 정 회장은 “얼마가 필요하냐”고 물었고, 저는 “8억원만 후원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정 회장은 흔쾌히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정 회장의 약속은 ‘대우 회장단’의 강력한 반대에 봉착해 백지화될 뻔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3억원으로 확정됐습니다. 정 회장의 후원은 첫 해에 3억원, 다음 해에 3억원, 그리고 제3회 영화제 때 2억원으로 그쳤지만,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오늘을 있게 한 창업공신이었습니다. 저희는 첫 해부터 지금까지 그 공로를 기려 최우수 단편영화에 ‘선재상’(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장남의 이름)을 시상하고 있고, 지금도 상금 2000만원을 포함해 매년 1억원을 지원받고 있습니다.
한편 서울의 지원 세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3월 11일, 서울 필동 ‘한국의 집’에 영화단체장들을 초청해 오찬을 했습니다. 협조를 부탁했습니다. 강대진 전국극장협회장과 곽정환 서울시극장협회장은 제 얘기를 듣자 무척 난감해하더군요. 왜냐하면 그 며칠 전, 1997년 서울에서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려는 조순 서울시장에게 ‘영화계와 사전협의’가 없었고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해 포기하게 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가 내년도 아닌 그해 9월에 개최하겠다며 협조를 부탁하니 그럴 수밖에요. 결국 저와의 오랜 친분 때문에 전폭 협조키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이에 따라 5월 17일 신라호텔에서 문정수 부산시장이 초대한 영화단체장 만찬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영화제는 처음부터 크게 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고, 부산에서 영화 촬영할 경우 부산시청까지도 개방하겠다는 문 시장의 약속에 곽정환 회장과 강대진 회장은 1억원을 협찬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저는 문 시장에게 모금을 위한 ‘디너파티’를 열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자리에 부산의 기업인 200명을 초청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7월 24일 파라다이스호텔에서 김동건 아나운서의 사회로 진행된 모금 행사에는 김지미 윤일봉 남궁원 강수연 임권택 등 영화인이 참석해 분위기를 고조시켰습니다. 부산의 고려산업, 동성화학, 진영수산, 동성여객, 자유건설, 우성식품, 적고(현 유니크), 태화백화점에서 2500만원씩 2억원을 협찬하는 등 4억원이 모아졌습니다. 곽정환 회장은 6월 3일 영화배우인 부인 고은아 여사와 함께 1억원, 고교 후배인 중앙산업 조규영 회장 역시 부인인 영화배우 정윤희 이름으로 1억원을 후원했습니다. 영화제가 임박해 오면서 파라다이스호텔과 한일그룹, 제일제당에서 각각 1억원을 협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가까스로 입장료 수입 4억원을 포함, 22억원을 확보해 적자 없이 첫 영화제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자금에 숨통이 트이면서 영화제 준비는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포스터가 결정되고 카탈로그가 만들어졌습니다. 고유한 ‘로고’가 없었던 대부분의 후원 기관, 협찬 회사들을 위해 카탈로그에 게재할 광고 문안까지 세심하게 챙겨야 했습니다. 8월 21일에는 회의하다 말고 밤중에 억수로 퍼붓는 빗속에 동래고속버스터미널로 달려가 심야버스로 서울에 도착, 집에 있던 ‘버라이어티’ 잡지의 ‘축하광고’ 문안들을 찢어 첫 비행기로 부산에 내려와 축하 광고에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던 사무국은 부산의 ‘시네마테크 1과 1/2’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운영하는 일을 맡겼고, 저는 부산대에 가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설명회도 가졌습니다. 360명의 자원봉사단이 꾸려졌고, 이들에 대한 교육과 발대식까지 마쳤습니다.
스크린에 투사할 자막을 위해 최윤나 팀장이 이탈리아와 일본 등을 순방하며 조사한 끝에 일본 도쿄영화제와 후쿠오카영화제에서 사용하는 일본의 자막기술팀에 용역을 주기로 하고 계약했죠. 영화제가 끝난 뒤 자막 시스템은 문원립 감독이 독자적으로 개발, 제2회 영화제 때는 일본 기술팀과 우리가 개발한 것을 반반씩 사용했고 3회부터는 우리 기술로 처리해 외화와 예산을 절감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결정은 대형 스크린에 의한 야외상영 제도를 도입한 것입니다. 스위스 로카르노영화제를 벤치마킹한 야외 상영은 스위스의 ‘시네렌트’ 회사와 계약, 6층 높이 대형 스크린(18×25m)과 완벽한 음향 시스템을 갖춰 바다의 정취와 맞물린 환상적인 분위기로 부산영화제의 명물이 됐습니다.
남은 문제는 홍보였습니다. 저는 서울과 부산에서 언론사 간부와 기자들을 쉴 새 없이 만났고, 협조를 구하는 일에 주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영화제 초청작품 선정이 완료된 후 가진 8월 6일 오후 부산의 기자간담회와 8월 7일 오전 서울의 기자회견을 계기로 서울과 부산의 언론들이 대서특필, 또는 집중 방송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습니다. 언론의 적극적 지원은 부산국제영화제를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예기치 못했던 난관이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찾아왔습니다.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의 심의 문제였습니다. 공륜에서는 법규상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모든 영화를 심의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영화제에서 검열은 치명적이고, 부산영화제의 경우 출범과 동시에 좌초, 파선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저는 공륜 심의위원들이 부산에 내려와 심의해 줄 것을 요청했고, 모든 심의 결과는 공문으로 받도록 해서 심의 과정과 그 결과를 통보받는 시기를 최대한 늦추면서 예봉을 피해나갔습니다.
9월 11일 오후 2시, 문정수 시장이 조성한 남포동의 ‘피프(PIFF)광장’의 테이프 절단식이 열렸고 9월 12일, 최종 점검과 함께 개막식에 참석할 초청 인사들의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등 초조하고 들뜬 분위기 속에서 개막 전야의 밤은 깊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