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없어 치료 못받고, 중단하고… 100세 시대? 가는 길이 다르다
입력 2011-02-24 18:12
15㎞ 떨어진 서울 강북·서초구, 기대수명 격차 5년 … 왜?
강북구와 서초구의 남성 기대수명 77.8세와 83.1세. 서초구와 강북구에서 살다 죽은 남자들의 연령별 사망률 추이를 보니 두 지역에서 태어나는 남자 아기는 각각 이만큼 살겠다고 추정된 값이다. 이 차이를 한두 가지 요인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자연사부터 질병, 자살, 교통사고 같은 다양한 죽음이 이 속에 담겨 있고, 각각의 죽음을 가져온 요인들을 분석해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같은 서울 하늘 아래에서 불과 15㎞ 남짓 떨어진 두 동네의 기대수명 차이가 5년이 넘는다는 점, 그리고 그 차이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두 지역을 비교해 그 비밀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돈 없어 치료 못 받았다, 50% vs 26%
2008년 시작된 ‘지역사회건강조사’가 이 의문을 푸는 열쇠를 제공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전국 250여개 시·군·구의 흡연율, 음주율, 비만율, 건강검진율 등 건강과 관련된 48개 항목을 해마다 조사하고 있다.
강북구와 서초구 조사 결과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경제적 이유로 인한 미치료율’이다. 최근 1년간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유를 물었다. “돈이 없어서”라고 답한 이들의 비율이 강북구는 50.2%, 서초구는 26.6%였다. 2배에 육박하는 차이다.
두 구는 흡연율, 비만율, 고위험 음주율에서도 차이를 보였다. 흡연율 27%(강북구)와 19.9%(서초구), 비만율 22.3%와 18.9%, 고위험 음주율 19.9%와 12.7%다. 고위험 음주율은 최근 1년간 술을 마신 경험이 있는 사람 중 한 번 술자리에서 남자는 소주 7잔 또는 맥주 5캔 정도, 여자는 소주 5잔 또는 맥주 3캔 정도를 마신 사람의 비율이다.
흡연·비만·음주율 차이는 만성질환 차이로 이어진다. 평생 만성질환을 앓은 경험이 있는 비율은 고혈압 18.3%(강북구)와 16.2%(서초구), 당뇨병 7.2%와 5.1%, 관절염 20.7%와 8.9%다. 강북구가 모든 만성질환에서 서초구보다 비율이 높다.
흥미롭게도 실제로 병원을 찾는 사람은 서초구민이 더 많다. 건강보험관리공단의 ‘2008 지역별 의료이용 통계’를 보면 고혈압으로 병원을 찾은 이는 서초구 4만932명, 강북구 3만5996명, 당뇨병은 서초구 1만5737명, 강북구 1만3775명, 관절염은 서초구 3만7236명, 강북구 3만4212명이다.
환자는 강북구에 많은데 정작 병원은 서초구민이 더 찾는다는 뜻이다. 김상미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원은 “강북구민은 아파도 병원에 못 가거나 안 간다는 의미다. 건강에 대한 태도, 생활의 여유 등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황사가 심한 기간에 천식, 기관지염으로 병원 찾는 환자 수를 보면 서초, 강남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말했다.
유방암 조기 발견, 우연일까
양희경(43)씨는 2009년 3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왼쪽 가슴에서 작은 혹이 발견됐다. 다행히 암세포가 상피조직 안에만 존재하고 아직 기저막을 침범하지 않은 상태, 0기였다.
양씨는 즉시 수술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를 28번 했고 석 달마다 정기 검진을 받았다. 전이 위험은 적지만 오른쪽 가슴에서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했기에 주의를 기울였다. 지금은 검사 주기를 6개월로 늘렸다. 유방암을 0기인 상피내암 단계에서 발견하면 5년 생존율은 거의 100%에 이른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암세포를 발견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양씨는 “나를 살린 건 이사였다”고 말한다. 그는 2005년 서초구로 집을 옮겼다. 2004년 유방암 검진을 받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그녀에게 ‘유방암 검진비를 지원한다’는 내용의 구청 소식지가 날아들었다. 동네 아주머니가 함께 가보자며 양씨까지 접수해줬고 집 근처 민간병원에서 유방암 검진을 받았다. 검진비 14만원 중 4만원을 구청이 내줬다.
서초구 보건소는 ‘유방암 제로 프로젝트’를 10년 넘게 운영 중이다. 30세 이상 여성이라면 언제든 유방암 검진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서초구 관내 의료기관 6곳과 연계돼 있어 굳이 보건소로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서초구 보건소는 지난해 서울시의 25개 구 보건소 평가에서 1위를 차지했다.
‘최근 2년 동안 건강검진을 받은 사람 수’는 2008년 현재 서초구가 57.5%, 강북구는 43.5%였다. 차이는 고위험군에서 두드러진다. 50·60대 건강검진율은 강북구가 60.5%, 65.6%였지만 서초구는 76.7%, 80%나 됐다. 15% 포인트의 격차.
두 구의 건강검진 격차는 ‘본인부담 종합건강검진’에서 비롯됐다. 자기 돈 들여 건강 상태를 검사한 사람의 비율은 서초구가 44.9%로 강북구(20.1%)의 배가 넘는다. 산업장 특수건강검진, 건강보험 건강검진에서는 두 구의 차이가 없었다.
건강검진율은 건강에 직접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건강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암검진율, 독감예방접종률도 비슷한 범주의 지표다.
2008년 암검진율은 서초구 40.3%, 강북구 33.9%. 최근 1년간 독감 예방주사를 맞은 비율도 서초구 33.9%, 강북구 25.6%로 차이가 났다. 서초구민이 강북구민보다 건강에 관심이 크다는 뜻이다.
기대수명 3대 결정요소
‘경제적 이유로 인한 미치료율’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숨어 있다. 강북구 자료에서 “돈이 없어 치료를 중단했다”고 답한 이들을 교육수준별로 나눠보니 학교를 다니지 못한 이들이 60%로 가장 많았다. 대졸 이상은 한 명도 없었다. 월 가구소득별로 나눠보면 100만원 이하가 68.4%로 가장 높고, 301만원 이상이 9.9%로 가장 낮았다.
흡연율·음주율·비만율·건강검진율 등이 건강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지표라면, 소득·직업·교육 수준은 간접 영향 지표다. 두 구는 이런 간접지표에서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①소득. 2008년 서초구 가구당 월평균 소득은 479만원으로 강북구(278만원)의 1.7배. 서초구는 서울 25개 구 중 1위, 강북구는 22위다. 지방세 수입도 차이가 크다. 95년 서초구 지방세는 3336억원. 강북구(644억)보다 5배 이상 많다. 2008년엔 1조176억원과 1689억원으로 6배 넘게 벌어졌다. 구민들을 위해 쓸 돈이 서초구가 6배 많다는 뜻이다.
②교육. 95년 서초구민 중 대학에 다니거나 졸업한 이는 17만2300명이었다. 6세 이상 인구 중 48%다. 강북구는 7만3000명으로 6세 이상 인구수 중 20%에 불과하다. 10년 후 같은 조사에서 서초구엔 21만명이, 강북구에선 9만1000명만이 대학 재학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6세 이상 인구 중 각각 60%와 29%.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강은정 부연구위원은 논문 ‘성별 교육수준별 건강수명의 형평성과 정책과제’에서 ‘많이 배우면 오래 살고, 심지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입증했다.
논문에 따르면 2005년 20∼24세인 초졸 남성의 기대수명은 38년이었다. 중졸 44.4년, 고졸 50년, 대학 이상 52.2년이다. 대학을 다닌 사람이 초등학교 졸업 학력자보다 14년 이상 더 산다는 뜻이다. 기대수명 중 건강하게 지낼 것으로 예상되는 기간인 ‘건강수명’ 격차는 더 컸다. 20∼24세 초졸 남성은 32.1년인 반면 대학 이상은 48.7세로 16년차였다.
③직업. 강북구와 서초구는 사회적으로 ‘힘 있는’ 직업을 가진 주민의 수도 차이가 컸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강북구 취업자 13만7000명 중 ‘의회 의원,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는 3400명(2.5%)에 불과했다. 서초구는 취업자 15만2000명 중 1만3000명(8.6%)이었다.
다른 직업군도 마찬가지. 전문가 1만3000명(9.5%·강북구)과 3만9000명(25.7%·서초구), 기술공·준전문가 1만3000명(9.5%)과 1만9000명(12.5%), 사무종사자 2만5000명(18.2%)과 3만4000명(22.4%)이었다.
많이 배우면 좋은 직장을 구할 확률도 높다. 좋은 직장은 높은 소득을 보장해주고 깨끗하고 안전한 환경을 제공한다. 서울의료원 정책연구실장을 겸하고 있는 윤석준 고려대 교수는 “소득·직업·교육 정도가 사회경제 수준을 결정하는 3대 요소다. 사회경제 수준과 수명의 상관관계가 크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라고 설명했다.
서초구와 강남구, 미묘한 차이
서울 각 구의 기대수명은 모두 늘었다. 95년 대비 2008년 기대수명이 6.6년 늘어난 강동구의 증가폭이 가장 컸고 서초 6.5년, 구로 6.3년, 송파 6.2년 순이었다. 가장 조금 늘어난 곳은 광진 4.2년, 강남 4.5년, 은평 4.7년, 동대문 4.8년 등이었다.
특이한 건 강남구다. 강남구는 흡연·비만·고위험음주율이 19.7%, 14.8%, 14.4%로 가장 낮은 축에 든다. 건강검진율도 57.6%로 서울에서 1위다. 간접지표들도 좋다. 강남구 월평균 가구소득은 453만원으로 서초구에 이어 2위다. 교육 수준은 대학 재학 이상이 29만3000명으로 서초구보다 많다. 직업은 취업자 21만1000명 중 의회의원·고위임직원 및 관리자가 1만9000명(9%), 전문가 5만명(23.7%), 기술공 및 준전문가 2만6000명(12.3%), 사무종사자 4만6000명(21.8%) 등 서초구와 유사하다.
하지만 95년 대비 2008년 기대수명 증가율은 강남구가 꼴찌에서 두 번째(4.5년)였다. 서울시 관계자는 “강남구에 저소득층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서울시의 2008년 ’서울서베이’ 조사를 보면 강남구 저소득층 비율(가구당 월소득 149만원 이하)은 10.1%로 서초구 4.4%보다 배 이상 많았다. 하지만 송파 8.6%, 강동 10.1%, 구로 11.3% 등 기대수명이 크게 향상된 다른 구들과는 비슷했다.
조 교수는 “주민 간 네트워크, 신뢰, 사회참여 등이 차이 나면 건강에도 영향을 끼친다. 강남구의 사회자본이 다른 구보다 좋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서초구 자원봉사센터는 2007년부터 전문봉사단을 꾸려 운영 중이다. 구내 자원봉사단체들을 교육·문화공연·의료보건 등 10개 분야로 묶었다. 전문가들이 많은 동네 특성을 자원봉사에도 적용하기 위해서였다. 수준이 높아지자 입소문이 났고 지원자가 늘었다. 2007년 68개 팀에서 시작한 전문봉사단은 현재 130개 팀이다. 서울은 물론 전국에서 독보적인 수치다.
사회자본을 평가하는 지표에서 강남구는 바로 옆 서초구와 차이를 보였다. 서울서베이 조사에서 ‘친척 및 친구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긍정적”이라고 답한 점수는 2008, 2009년 서초구가 6.99점, 7.04점인 반면 강남구는 6.88점, 6.71점에 그쳤다. ‘사회생활에 대한 만족’ 점수도 서초구가 7.04, 6.97점인 반면 강남구는 6.68, 6.52점이었다. 자원봉사활동 경험률도 28.3%로 서초구(33.8%)에 비해 저조했다.
기대수명과 음주율·흡연율·건강검진율
기대수명과 각종 건강 지표들의 상관관계는 다른 구에서도 일정하게 반복된다.
2008년 남성 기대수명의 상위권은 서초구(83.1세) 송파구(81.1) 강남구(81) 강동구(79.8) 영등포구(79.8) 광진구(79.5) 등이다. 하위권에 강북구(77.8) 중구(77.9) 중랑구(78) 노원구(78.1) 금천구(78.1) 등이 있다. 여성 기대수명 순위도 대체로 비슷하다.
이런 패턴은 각 구의 흡연율 음주율 비만율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흡연율이 가장 낮은 1∼3위는 기대수명이 가장 긴 송파·강남·서초구다. 송파·서초구는 음주율도 20위와 23위로 최하위권에 속했다. 비만율도 강남 24위, 서초 19위, 송파 17위 등이었다.
가장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인 건 건강검진율이었다. 중랑·강북·금천·중·노원구 등 기대수명 하위권 구들이 건강검진율 하위 20∼25위를 모두 차지했다. 강남·서초구는 각각 1, 2위였다. 경제적 미치료율도 기대수명과 거의 같은 패턴을 보였다. 기대수명 하위 5위권에 드는 강북·중·중랑·노원·금천구는 이 지표에서 모두 중하위권이었다.
김원철 기자 won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