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서 태어난 책은 이 테이블에 가장 먼저 오른다

입력 2011-02-24 18:05


인터넷서점 예스24 MD, 화요일 미팅현장

“K출판사 편집자들이 독립해 만든 첫 책입니다. 스타일은 K작품과 비슷합니다. 그림 좋고, 주제 좋습니다.”

“문장은 조금 거칠지만 읽는 데 큰 무리 없습니다. 초기인데 일단 반응은 좋습니다.”

“Y출판사에서 야심차게 내놓은 역사책입니다. 좌우 균형 잡힌 서술에 사진이 아주 풍부합니다.”

MD, 뭐(M)든지 다(D)하는 사람

22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여의도 온라인 서점 예스24 본사 회의실의 대형 탁자에는 인문·사회과학 책부터 유아용 그림책과 패션 실용서까지 신간 서적 수십 종이 어지럽게 포개져 있었다. ‘로지코믹스’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 ‘공룡이 유치원에?’ ‘남자, 스타일에 눈뜨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기억술사’ ‘밀실살인게임 2.0’ ‘언노운’ ‘바느질 수다’….

매주 화·금요일 두 차례 열리는 MD 회의. 홈페이지 정중앙 ‘오늘의 책’부터 ‘MD 추천도서’나 ‘새로 나온 책’까지 책마다 자리가 결정되는 시간이다. 이날은 이견이 없었다. 버트란드 러셀의 삶과 지적 탐색을 만화로 그린 ‘로지코믹스’는 동료 지지로, ‘위기는 왜 반복되는가’는 저자 로버트 라이시 명성 덕에 무리 없이 ‘오늘의 책’에 안착했다. 신문으로 치면 1면 헤드라인을 꿰찬 것이다.

머천다이저(merchandiser)의 약자인 MD는 상품 구매에서 진열, 판매, 재고 관리까지 책임지는 온라인 서점의 핵심 인력이다. 온라인 서점 첫 화면 구석에 실리는 작은 박스 광고의 1주일 가격은 150만원 안팎. 3∼4일간 첫 화면 정중앙에 걸려 15만∼20만건 클릭이 보장되는 ‘오늘의 책’은 유료 광고로 치면, 짜게 따져 600만∼700만원짜리다. 그걸 공짜로 내주는 권한을 쥔 게 바로 MD들이다.

예스24 도서팀에 근무하는 9∼11년차 MD 김희조(37), 박수호(34)씨에게 대한민국에서 신간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본다는 온라인 서점 MD에 대해 들었다.

신간이 제일 먼저 도착하는 곳

오후 2∼4시, 회의실이 이번에는 출판사 ‘영업맨’으로 북적였다. 따끈한 신간과 자료를 양손 가득 든 이들의 목표는 담당 MD들이다. 10분 안팎의 시간 내에 책의 장점과 타깃 독자, 마케팅 계획까지 선전해야 한다. 편차는 있지만 MD 한 사람이 1주일에 받아드는 신간은 30∼40종. 출판사 관계자가 직접 찾아오는 대면 홍보가 하루 10건 안팎, 전화는 수십 통, 이메일은 500통이 넘는다.

10년 전만 해도 대한민국에서 신간이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교보문고였다. 지난해에도 매출 5000억원으로 온·오프라인 통합 1위를 기록한 교보문고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하지만 오프라인이 강점인 교보는 한 가지, 시간경쟁에서 온라인에 밀렸다. 신간 정보를 접한 독자가 매장에 나가 책을 구매하기까지 최소 1주일은 걸린다. 한 출판 영업자는 “온라인 서점은 다르다. 홈페이지에 정보만 올리면 클릭 한 번으로 구매가 가능하다. 실시간이다. 이 때문에 영업자의 첫 번째 타깃은 온라인 서점 MD”라고 전했다. 그 다음이 교보문고, 총판(도매점), 기자와 리뷰어 순이다.

구매권도 MD 위상을 바꿨다. 온라인 서점 초창기, 홈페이지 편집권을 쥔 에디터였던 MD는 5∼6년 전 구매 권한까지 가지면서 역할이 커졌다. MD 한 사람이 1주일에 주문하는 책은 10만권 안팎이다. 대부분 독자 주문을 자동 발주하는 형태지만, 책을 미리 확보하는 ‘베팅’을 하기도 한다. 위탁판매(책이 팔린 뒤 출판사에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인 오프라인 서점과 달리 온라인 서점은 돈을 주고 출판사에서 책을 사들인다. 사들인 책을 팔 책임은 온라인 서점이 진다. 따라서 MD에게는 책을 살 수 있는 권한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김희조씨는 “소개한 책이 잘 팔리지 않거나 물량을 확보한 책이 재고로 쌓이면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추천도서를 선정할 때 독자 반응까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점과 미디어 사이

“우리 책이 최고”라는 출판사 선전과 MD 자신의 취향, 사회적 이슈와 트렌드. 그 모든 변수를 고려해 의미 있고 잘 팔리는 책을 집어내는 것. 말처럼 쉽지는 않다. 김씨가 책 보는 요령을 귀띔했다.

“일단 출판사를 보죠. 그 출판사가 냈던 책의 분위기, 성향, 주제, 이런 게 있으니까 그걸 살피는 겁니다. 다음이 저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주제와 맞닿아있는지도 봅니다. 물론 판매량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판매가 어느 정도 예측되는지 따지고. 책을 살필 때는 머리말, 목차 본 뒤 중간 중간 ‘발췌독(讀)’을 합니다.”

간혹 남들이 눈여겨보지 않는 책을 골라 성공하기도 한다. MD의 보람이다. 우석훈의 ‘88만원 세대’가 그런 예라고 했다. “레디앙 출판사의 첫 책이었어요. 저자도 당시에는 스타가 아니었고. 왠지 감이 와서 추천했는데 많이 팔렸어요. 제가 발굴했다기보다 여러 조건이 맞았던 거지만. 제가 한 건 아닌데,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도 알려지지 않은 저자에 1인 출판사 책이었는데 ‘오늘의 책’으로 추천해서 성공한 경우죠.”(박수호)

온라인 서점은 책을 파는 상점인 동시에 책에 관한 정보가 유통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MD의 지위 역시 이중적이다. 책을 잘 파는 마케터이자 좋은 책을 선별하는 기자. 두 사람 모두 그런 태생적 딜레마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김씨 설명이다. “하루 40만명이 예스24 홈페이지를 방문해요. 그들에게 여러 분야 신간을 고루 소개할 임무, 그러니까 미디어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해요. 매출로만 본다면 매일 학습서를 올려야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잖아요.” 실제 예스24 ‘오늘의 책’에 가장 많이 선정되는 책은 국내 문학과 경제·경영 서적이지만 판매량 비중은 학습참고서와 어린이 책이 월등히 높다.

불행히도 이런 설명을 액면 그대로 믿는 출판인이 많은 것 같지는 않다. 홈페이지에 광고를 많이 하는 출판사, 이벤트를 자주 하거나 싼 값에 책을 넘기는 출판사 신간이 메인 페이지에 자주, 오래 노출된다고 믿는다. 간혹 로비를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MD들은 억울해했다.

“간혹 MD가 대단한 권력을 휘두르는 것처럼 비판적인 분들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MD가 권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골랐다고 다 잘 팔리는 것도 아니고. 다만 구매권에 책을 추천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있겠죠.”(김)

박씨는 내부 규칙을 들려줬다. “명절 때 들어오는 선물은 전부 돌려보내고, 접대라고 불릴 만한 술자리는 갖지 않는 게 원칙입니다. MD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사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아요(웃음). 온라인 서점에 비판적인 논객들이 간과하는 점은 온라인이야말로 출판사 차별이 없다는 겁니다. 작은 출판사가 책으로만 승부할 수 있습니다.”

MD가 못하는 한 가지

국내에 MD라고 분류될 만한 사람은 80명 정도가 있다. 대부분 책이 정말 좋아,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아 이 직업을 택했다. 하지만 막상 MD에게 가장 허락되지 않는 게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책을 완독하는 일이다. 특히 담당 분야에서 정독하는 책은 “거의 없거나 아예 없다”고 했다.

독서에 대한 욕구는 주말을 이용해 자기 분야가 아닌 책으로 해소한다. 경제·경영을 담당하는 박씨는 인문·사회과학 책을, 인문·사회과학을 담당하는 이씨는 소설·여행서를 주로 읽는다. 한 달에 4∼5권에서 10권까지 읽는다니 일반인보다는 다독이다. 홍보 담당자 말로는, 예스24 직원 대부분이 3개월에 10만∼50만원을 쓰는 마니아 등급이라고 했다. 그래도 이들의 소원은 책 좀 제대로 보는 것이다.

“혹 MD가 되고 싶은 분들한테 이 말은 꼭 하고 싶어요. MD가 책만 보는, 그런 아름다운 직업은 절대 아닙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