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말년, 민중과 자연 속에 있었다… ‘백석전집’ 개정증보판 발간

입력 2011-02-23 19:00


정지용과 함께 한국서정시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시인 백석(1912∼96)이 말년에 쓴 미공개 시 3편과 산문 3편이 발굴 공개됐다.

김재용 원광대 국문학과 교수는 최근 ‘백석전집’(실천문학사) 개정증보판을 펴내면서 시 ‘석탄이 하는 말’ ‘강철 장수’ ‘사회주의 바다’와 산문 ‘막심 고리키’ ‘마르샤크의 생애와 문학’ ‘이솝과 그의 우화’ 등 새로 발굴한 작품을 실었다. 이 가운데 시 3편은 1962년 북한에서 발간된 동시선집 ‘새날의 노래’에, 산문 3편은 1956∼62년에 발간된 ‘아동문학’에 각각 수록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62년 말 사실상 창작 활동을 중단한 백석의 마지막 집필 시기에 씌어졌다는 점에서 베일에 싸인 그의 말년을 어림케 한다.

“층층히 나서는/우리들의 굳은 벽을/밤낮 없이 뚫러 나아가는/그 사람들의 힘으로 하여/그들의 그 무쇠 같은 팔뚝들로 하여/그 불덩이 같이 뜨거운 마음들로 하여/그리고 무엇보다도/우리를 어서 오라고/어서 많이 오라고/부르고 또 부르신 당의 뜻으로 하여//우리 천 길 땅 밑으로부터/밝고 넓은 땅 우로 올라왔다”(‘석탄이 하는 말’ 부분)

자신의 문학관을 고집하던 백석은 1958년 1월 숙청돼 양강도 삼수군 국영협동조합의 축산반에서 양치기로 살았다. 사실상 유배지에 해당하는 그곳에서 그가 한때 몸담았던 평양의 ‘문학신문’에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삼수군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초롱불을 켜야 할 정도로 산협의 벽지이다. 양을 치다가 나중에 농산반으로 옮겨 일하게 된 백석은 번역과 아동문학에만 전념했던 해방 직후와는 달리 다시 펜을 잡고 산문과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김재용 교수는 “백석은 국가주의와 관료주의의 억압을 받던 평양을 떠나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삼수군에서 새로운 공동체 생활을 경험하면서 흥분에 휩싸였을 것이고 이를 시로 옮겨야 할 충동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라며 “다만 1961년 유배 당시에 쓴 시라는 점에서 친북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일제하에서 서울보다는 여러 지방을 돌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연과 밀착된 민중적 삶의 방식에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으려 했던 백석은 삼수군 국영협동조합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다시 엿보았던 것이다.

그의 말년 시들은 “공산주의 해를 바라/나라를 떠메고 내달리는/용감한 여성 장수들의 앞에서/어머니 당이 걸어 가신다”(‘강철장수’)처럼 체제 찬양의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 그는 ‘우리 목장’(1961)이라는 제목의 마지막 시집을 끝으로 더 이상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 이는 62년 10월에 있었던 북한 문학계 내부의 숙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바로 이 시기에 도식주의 극복을 내세우며 자기 식의 글쓰기를 주장해온 소설가 한설야, 시인 민병균, 비평가 윤세평 등 일련의 문인들이 대거 숙청된다. 김 교수는 “1950년대 후반의 산문에는 북한 주류문학과 긴장 관계에서 자기 색깔을 지킨 백석의 모습이 드러난다”면서 “제목만 전해지고 있는 백석의 마지막 시집이 발굴되면 백석 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편제의 전집을 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