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을 바꿔라! 삶도 확 바뀐다… ‘여러가지문제연구소’ 김정운 소장에게 여러가지 묻다

입력 2011-02-23 19:11


지난 11일 오후 1시40분 서울 한남동 제일타워 F층. 김정운(49) 교수의 ‘여러가지문제연구소’ 문은 잠겨 있고, 밖으로 나간들 그 흔한 카페 하나 없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냈더니 김 교수에게서 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서슴없이 알려주는 김 교수. 생각보다 더 ‘쿨’했다.

김정운(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고정관념을 깨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 스타일부터가 다른데, 파마머리에 성공회 신부를 연상케 하는 복장이라든가, 파스텔톤 양복 상의에 노란 행커치프, 흰 바지 차림 등은 나이를 잊은 패션이다.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르게 한 ‘난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도 제목부터가 파격이다. 인생의 전·후반을 나누는 기준도 재밌다. 파마하기 전과 파마 후. 파마 전엔 지극히 평범한 아저씨였다고 고백하는데, 사실 파마하기 전에도 딱따구리 넥타이를 매는 개성 강한 아저씨였다. 어찌됐건 그날의 인터뷰도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모 잡지사와 ‘망사스타킹’에 관한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김 교수의 손엔 망사스타킹이 들려 있었다.

-웬 망사스타킹이에요.

“망사스타킹 얘길 책에 썼더니 잡지사에서 같이 뭐 좀 해보자고 해서(그는 망사스타킹에 주름치마를 입은 여성을 보면 주저앉아버릴 거라고 썼다). 망사가 싫어요? 억압인데. 저항이 거세면 억압이고, 아니면 기호고. 뭐 싫을 수도 있지.”

-요즘 무지하게 바쁘죠.

“우리가 어느 맥락에서 봤더라. (제가) 파마했을 때예요 안했을 때예요. 파마 안했을 때. 그러면 진짜 오래됐다(김 교수와는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여가학회 세미나에서 만났다). 돈도 많이 벌었고, 그때보다 잘 나가지. 많은 차이가 있죠. ‘난 아내와의 결혼….’ 저 책 이후에. 여러 가지 요소가 같이 겹쳤는데 시기적으로 저 책 이후에 바빠졌죠.”

-이번에 대학 입학하는 아들, 공부 못해 속상했다면서요.

“응. 공부 못하는 아들. 그렇죠. 나라고 다른가. 서울대 연대(작곡과) 가면 좋지. 근데 애가 워낙 잘생겼기 때문에. 얼마든지 인생 재밌게 살 수 있으니까. 좋은 대학 나와서 지금 애들이 잘 살고 있나 보면 사실 그렇지도 않거든. 나 공부 못했지만 잘 살잖아.”

-공부 잘한 분이 무슨 말씀을.

“나 공부 못했어. 전교 430등인가 졸업했어 700명 중에. 고대 나왔지만 재수해서 나왔지. 공부 안하는 거지 못하는 게 어딨어요. 난 고등학교 때는 놀지도 못하고, 적응을 못했어. 만날 싸움만 했어. 고등학교 때가 암흑기였어. 정학당하고 싸움하고 부모님이 만날 학교 쫓아오고 그랬죠.”

-아버지께서 유명하신 분이던데.

“잉? 우리 아버지 얘긴 어디서 들었어요. 나 진짜 싫어요. 아 입장 바꿔 생각해봐. 좋겠어요? (중략) 난 지금도 아버지와 연관시켜 얘기하는 걸 제일 싫어해. 아니 내 얘길 하는 데 왜 우리 아버지 얘길 해야 돼. 다들 놀라지. 그러나 여전히 싫어요. 그것 봐. 얘기 되잖아요. ‘그 사람 아들이래?’ 우리 아버지를 제가 되게 좋아해요. 지금은 내가 아버지한테 잘하지. 근데 뭔 인터뷴거예요?”

-(급히 화제전환)방송 잘 봤어요(김교수는 KBS 2TV ‘명작스캔들’ 공동MC다).

“봤어요? 조영남씨하고 나하고 잘 맞지. 나는 제일 싫어하는 게 어깨에 힘주고 얘기하는 거. 한국 지식인들의 문제는 뭐냐면 계몽하려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그러고. 교양 있다는 건 삶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관심 기울이는 거죠. 한국사회가 교양이 없는 이유는 모여 앉으면 아이돌 복근, 허벅지 얘기하고, 정치인 욕하는 것 외엔 할 얘기가 없는 거예요. 우리 삶엔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고 그 중에 문화예술이 있겠다.”

-반응은.

“반응이 극과 극인데 기존의 문화예술에 관심 가졌던 사람들은 혹평을 해. 분노 수준이야. 자기들의 영역을 이렇게 우습게 얘기하면 되느냐. 허위의식이죠. 어떻게 자기들만의 전유물이야. 거의 신이야. 내가 슈베르트를 웃기게 얘기하고 마네 모네를 이상하게 얘기하면 너무 싫어해요. 멘델스존 음악이 그 시대엔 서태지의 노래였는데 말이죠.”

-(벽에 걸린 사진을 보며)독일 유학시절엔 날씬했네요.

“나요, 무지하게 말랐었어. 왜. 그땐 삶이 괴로웠으니까. 내가 학생운동을 열심히 했는데, 고대에서 제적도 당하고, 강제징집도 당하고. 근데 대학 졸업할 때가 되니까 다들 노동운동을 하는 거야. 근데 난 노동운동은 정말 체질이 아니거든. 내가 어떻게 공장 가서 일을 해. 정말 자신이 없는데. 그렇다고 미국에 유학갈 순 없고. 미 제국주의 두고 데모 무지하게 했는데, 대기업에 취직할 수도 없고, 노동자 피 빨아 먹는 거 같아서 말이야. 독일 유학가면 욕을 덜 먹을 거 같아. 학비도 없고. 그 당시 좌파들이 많이 갔다고. 베를린하고 마브룩이란 데로. 독일 통일 전이니까 가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을 해야겠다. 내 인생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던 시기니까. 삶이 괴로운 데 어떻게 살이 쪄요.”

-(유학시절) 궁핍했나요.

“뭐 다들 그러니까. 독일 유학기간 내내 야간경비원 했고, 아내는 식당에서 피아노 쳤고. 삶이 힘들었지. 독일 통일 되니까 그 전까지는 역사에 가장 앞서 있다 생각했는데 동독이 무너지는 걸 보니까 역사에 뒤졌다는 생각도 들고. 공부는 힘들고 내가 학위 따서 갈 수 있나 그랬죠.”

-‘여러가지문제연구소’라니까 무슨 상담소 같아요.



“일종의 패러디여. 지식인은 세상을 문제로 봐. 그렇게 보면 다 문제지. 그래서 패러디한 거여. 모든 걸 다 얘기하자는 뜻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인데, 결혼하고 아이 낳고 어쩌다 보면 찾아오는 권태. 어떡하나요.

“가족은 항상 같이 있어야 하고 항상 행복해야 되고 공유해야 되고. 그거 가족이데올로기야. 난 그거 힘들다고 봐. 남편이나 아내나 자기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나갈 수 있다면 같이 있어도 즐거운 거고, 혼자 있을 때 하나도 재미없는데 같이 있으면 더 재미없지. 행복한 사람은 할 얘기가 많아. 어릴 때는 아이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잖아. 이눔 시키가 고등학교 가면 할 얘기가 없다고. 사고 친 얘기, 마음에 안 드는 얘기뿐이지. 서로 할 얘기가 없으니까 힘든 거라고.”

-한국남자들, 어떤가요.

“난 불쌍해요. 제일 불쌍한 이유는 뭔가 하면 자기가 좋아하는 게 뭔지 몰라. 난 좋아하는 색깔, 조명, 커피, 다 구체적으로 있어요.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면서 찾아낸 거죠. 하지만 사회적 책임과 억압으로 내가 좋아하는 걸 모르고 평생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야. 그러니까 만날 술만 먹는 거라고. 난 술 싫어하거든. 술 먹고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거 짜증나.”

-둘째는 낳아야 할까요. 저출산과 관련한 질문입니다.

“애를 키워본 입장에서 봤을 때는 애를 낳고 키운 걸 잘했다는 생각을 해요. 키울 땐 힘들어도 인생이 기니까 그 힘든 기간이 짧다고. 애 키우는 기간이 20년인데 우리 백 살까지 살잖아요. 할 얘기가 많아야 될 거 아니유. 그래도 힘들면 안 낳으면 되지 뭐. 그것도 내가 볼 땐 닫힌 사고야(다문화가정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언급).”

-개방적인가요.

“사안별로 달라요. 근데 진보를 하면 뭐 사학법 찬성해야 되고 호주제 폐지해야 되고, 보수쪽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그렇게 한심한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일사불란해. 세상이 어떻게 좌파 우파만 있냐고요. 앞파 뒷파, 속파 겉파도 있는데.”

-나눔이나 봉사에 대한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어떠세요.

“내가 인생이 잘된 지가 얼마 안 됐다고. 한 마흔 다섯부터 풀렸지. 그전까지는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어요. 어쨌든. 나는 그런 거 되게 싫어해요. 내가 자발적으로 그런 좋은 일 해보고 싶다. 남들을 위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 이런 마음이 있지. 그러나 ‘지식인이니까 돈 벌었으니까 뭘 해라’ 이런 건 너무 싫어. 자기가 기뻐서 해야지. 그런 테마는 안 다뤘으면 좋겠어. 내가 하게 되면 그냥 혼자 하는 거지 뭘 얘기를 해.”

-마흔 다섯 이전엔 어땠는데요.

“무지하게 꼬였지 뭐. 난 낚시만 다녔어. 갈 데 없음 뭐 한강에서도 낚시 했어요. 그냥 빠져버리고 싶었지.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했으니까. 난 기본적으로 외로운 사람이라고. 사람들하고 소통이 잘 안되는 사람이야. 사람들 만나면 재밌게 말하는 거 같지만 나 되게 피곤해해요. 원래 자라면서부터 론리 울프(외로운 늑대)야.”

-그나저나 파마 참 잘나왔네요.

“내 인생은 둘로 나뉘어요. 파마하기 전과 파마 후. 난 마누라가 끌고 가서 했는데, 처음엔 안 하려고 했지 내가 무슨 파마야. 근데 파마하니까 캐주얼한 옷이 어울리고, 캐주얼한 장소(홍대 앞)에 가게 되고. 나는 그렇게 말해요. 파마할 머리가 없으면 수염이라도 길러라. 하나만 바꿔도 삶의 차원이 확 달라진다는 거지. 의외로 쉬울 수 있어.”

-하는 일 중 하나만 해야 한다면.

“저술가죠. 교수는 내가 체질이 아닌 거 같아. 그게 고민이야. 후학 양성은 내 능력 밖인 거 같아요. 누구나 약점이 있지. 난 그게 약점이요. 제자들한테 무서운 교수예요. 그래서 다음 학기부터 소속을 바꾼다고 인문교양학부로. 밖에서 보는 나하고 달라요. 대중강연이라든지 학부생 모아놓고 교양 강연 하는 건 잘하는데 학문으로 들어가면 내가 너무 까다로워.”

-신앙은?

“뭐 큰 틀에서 (교회에) 가지. 그러나 난 가능한 한 거리를 두려고. (교회 얘기) 피하는 게 아니고 안 하는 거죠. 정신분석학적으론 관심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 테마를 얘기하고 싶지가 않아요. 왜냐면 내가 구속되거든. 어떻게든 걸려들잖아요. 종교, 정치. 난 그런 얘기 안 하지.”

■ 김정운 교수

1962년 서울 출생. 고려대 심리학과 졸업,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유대학 전임강사를 거쳐 2000년 귀국, 이듬해부터 명지대에서 강의해 왔다. 국내 최초의 여가학 석사과정인 여가경영학과를 개설했고, 주5일 근무제 시행과 함께 여가 전문가로 이름을 알렸다. ‘노는 만큼 성공한다’를 시작으로 ‘휴테크 성공학’ ‘일본열광’ ‘난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등을 출간했다. 별명은 B&G(뻥앤구라). 케이블 채널과 지상파에서 각각 코너를 맡아 MC로도 활동하고 있다.

글 이경선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