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1호는 가야금… 배재대 조셀린 클라크 교수의 한국 전통음악 사랑
입력 2011-02-23 18:51
그녀는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우리 전통음악을 더 잘 알고 사랑한다. 2006년 ‘가야금 병창’ 연구로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전시 도마동 배재대 아펜젤러학부 동아시아학과 조셀린 클라크(43) 교수다.
그녀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며 일반인을 상대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전통음악에 대해 강의하고 직접 가야금을 켠다. 판소리 실력도 수준급이다. 호남가(단가)와 춘향가 가운데 ‘사랑가’를 구성지게 부른다. 1990년대 세 차례에 걸쳐 KBS 외국인 국악경연대회에서 가야금 부문 1등과 대상도 수상했다. 다국적 연주단 크로스사운드 3Z플러스(ⅢZ+)를 만들어 해외 공연을 펼치고 있다. 올해로 11년째지만 아직 한국 무대에 서지는 못했다. 지난 21일 오후 이 대학 캠퍼스 서재필관에서 클라크 교수를 만났다. KBS 퀴즈 프로그램 ‘1대 100’에 출연할 예정인데 아는 게 많지 않아 큰 걱정이라고 했다.
차(茶)를 더 좋아하는 벽안의 여교수
기숙사 옆 서재필관 1층 108호실.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다. 현관으로 나오다 보니 가야금을 든 파란 눈의 여인이 저만치서 걸어왔다. 그녀는 가야금을 벽에 비스듬히 놓고 밥부터 먹자며 건물 곁에 있는 식당으로 안내했다. 두어 걸음 뗐을까, 무슨 중요한 물건이라도 떨어뜨렸는지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조그마한 액세서리 하나를 보여주더니 눈에 잘 보이는 창문턱에 올려놓았다. 짝 잃은 귀고리다. “비싸 보이지 않지만 주인한테는 아주 소중한 물건이죠.”
클라크 교수는 제육볶음 접시에 남은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밥공기에 넣고 삭삭 비벼 달게 먹었다. 연구실로 돌아온 그녀는 아담한 원탁 테이블에 다기를 내왔다. 마치 국악과 교수 연구실처럼 아늑하고 정겨웠다. 큰 키의 가야금(법금) 2개, 좀 작은 산조 가야금이 2개다. 사물함이 달린 3단 책장 오른쪽 벽 쪽에 검은색 ‘ㄴ자 소파’가 놓여 있다. 깔끔하게 정돈된 책상 위엔 컴퓨터 모니터와 노트북, 왼쪽 모서리엔 조그마한 항아리 화분을 땅 삼아 고사리 한 포기가 녹색의 향기를 내뿜고 있다.
차를 두 순배 따른 뒤 클라크 교수는 차 맛이 어떠냐고 물었다. 차는 뒷맛도 있지만 다 비운 찻잔을 코에 대면 그 차의 향기를 맡을 수 있다고 했다. 이름모를 꽃 냄새가 났다.
알래스카 빙하 속에서 자란 음악 신동
그녀는 1970년 미국 워싱턴 주에서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아버지를 따라 알래스카 주노로 이주했다. 세 살 때다. 고사리손엔 바이올린이 들려 있었다. 네 살 때 피아노,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클라리넷, 중학교 시절엔 오보에도 배웠다.
미국에서 가장 큰 주 알래스카는 한반도의 15배로 끝이 보이지 않는 설원, 빙하 천지다. 에스키모 원주민 학교에 다니면서도 외교관의 꿈을 꾸면서 자랐다. 법학을 전공한 그녀의 아버지가 일본계 회사의 변호사로 취직하는 바람에 고등학교 때 1년간 나고야에서 살았다. 일본 전통 악기 고토(13줄)를 배운 것도 그때다. 90년엔 중국 난징예술학원에서 쟁(21줄)도 익혔다.
92년 미국 웨슬리안대학을 졸업하고 스물두 살에 가야금을 배우러 한국에 왔다. 동북아 3국의 악기를 다 배우자는 심정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날의 기억을 그녀는 영원히 잊을 수 없다. 향음(香音)을 맛본 것이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어느 연주회에서 우연히 들은 가락이었다. 단순한 울림으로 끝나지 않는 독특한 맛이 났다.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온 몸의 피가 질주하는 듯했다. 이후 국악인 이지영씨를 사사하면서 가야금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이듬해부터는 국악인 지애리씨로부터 성금연류 가야금 산조와 신곡을 배웠다.
94년엔 석사학위를 하러 미국으로 돌아갔다. 2년 만에 동아시아학으로 학위를 받았다. 곧바로 박사학위 과정에 들어갔지만 몇 년간 세월만 낭비했다. 99년 다시 한국으로 와 2001년까지 다시 가야금을 품고 살았다. 이 무렵 첫사랑을 했으나 실패했다. 서울대 음대에서 1년 동안 청강도 했다. 최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음악가 박칼린씨도 그때 만났다. 클라크 교수는 “한국말도 제대로 못했는데 그로부터 하숙집을 소개받는 등 도움을 많이 받았다”면서 “고(故) 박동진 선생님을 만나는 자리까지 같이 데려갈 정도로 참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다.
조세린(趙世麟)이라는 한국 이름도 생겼다. 인간문화재 강정숙씨 집에 머물면서 강씨를 사사했고 틈틈이 판소리도 익혔다. 명창들을 만나 소리를 배우고 기록된 사설을 비교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唐詩) 원문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마침내 4년 만에 동양문화언어학 박사학위 논문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국에서 기독교는 일상생활
박사학위를 마치고 2007년 알래스카로 돌아간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의 늪으로 빠져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집안 형편까지 나빠졌다. 제대로 된 방이 아니라 차고에서 지냈다. 동양문화 박사인 그녀의 존재를 알아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빙산에 갇힌 배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렇게 2년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깊은 산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고함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왜 살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절규였다. 그때였다. 심청가 사랑가 방아타령 등의 판소리가 절로 나왔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박했다. 2005년 퇴직한 윤충남 하버드-옌칭연구소 한국학 관장의 도움으로 활력을 되찾았다. 2009년 가을 한국으로 돌아오자 거짓말처럼 우울증도 말끔히 사라졌다. “윤 선생님은 한국학 자료의 대부셨죠. 저를 위해 좋은 논문 자료도 다 주셨어요. 그분은 참 존경스러운 분이었어요. 제 인생의 가장 큰 스승님이죠. 열심히 가야금을 켜는 것이 은혜를 갚는 일이죠.”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가야금 연습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꿈이 없다더니 헤어지기 전에야 속마음을 보여줬다. 한국 전통음악을 세계인에게 알리고, 한국 음악과 세계 음악이 서로 소통하는 일에 신명을 다 바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3Z플러스다. 지난해 6월에는 고향 알래스카에서 공연을 했다. 중국인 연주가는 비파, 그녀는 가야금을 켰다. 이밖에 마림바, 트럼본, 색소폰까지 곁들인 다국적 음악을 연주했다. 이어 11월에는 미국 4개 도시 순회 연주를 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민족 전통음악 축제에서도 어김없이 그녀는 가야금을 켰다.
주일마다 교회에 가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기독교는 미국인의 일상적인 생활에 속한다고 했다. 몸에 배어 있다는 얘기다.
“가야금은 사람의 목소리와 같아요. 연주할 때 도구를 쓰지 않아요. 일본의 고토는 소리가 밝지만 깊은 울림이 덜해요. 중국의 쟁은 금속 줄을 쓰기 때문에 경쾌하고 아주 신이 나요. 그러나 한국의 가야금은 뭔가 달라요. 영혼을 울리는 소리죠. 정말 달라요. 한국 사람들은 왜 이렇게 좋은 소리를 사랑하지 않는지 가슴이 아파요.”
대전=글 윤중식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