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부머 이환구씨 은퇴 그 후… ‘인생 2모작… 오! 해피데이’
입력 2011-02-23 18:48
이환구(고양 하림교회 안수집사)씨는 베이비부머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서울 생. 그 세대가 그러하듯 가난과 출세가 삶의 키워드였다. 성장시대의 주역으로 활동하다 지난해 은퇴했다.
그의 첫마디. “직장생활 할 때 못 갔던 새벽기도회 마음껏 가게 됐으니 얼마나 좋아요. 새 사업도 시작해요. 인생 2모작이네요.”
지난 19일 낮 12시 경기도 고양시 중산동 중산정철어학원 강당에서 개업예배가 진행됐다. ‘원장 이환구’. 그가 섬기는 하림교회 홍성운 목사는 개업예배에서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설교했다. 교인들이 참석해 축하했다.
각계각층의 축하객도 눈길을 끌었다. 대한화재해상보험, 롯데손해보험, 민주노총 사무금융노련, 서울 명륜동 창현교회(허광섭 목사), 경기도 일산사랑의교회(최석범 목사) 관계자 및 선후배 등 지인 50여명이 참석했다. 이씨는 “이곳에 오신 분들은 암울한 시대를 같이 겪고 함께 극복한 동료요, 선·후배”라고 소개했다.
성장위주시대 한국 사회의 산증인
그는 성장시대 샐러리맨으로서 경제성장의 일익을 담당했다. 고려대 경영학과 74학번인 그는 81년 5월 대한화재해상보험에 입사했다. 주로 경리, 인사, 화재보험업무를 맡으면서 대리까지 진급했다.
그러다 우연히 노동조합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87년은 6월항쟁을 시작으로 민주주의의 문이 열릴 때였다. 사회 전반에서 인권 보장에 대한 요구가 높았다. 노조가 잇따라 설립됐다. 대한화재도 인권과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노조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참가 인원이 부족해 무산될 위기였다. 발기인 기준이 30명인데 3명이 부족했다. 이씨는 처음에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기대회 당일 밤 9시30분쯤 전화가 왔다. “노조 설립 인원이 부족하다. 도와 달라”고 했다.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 간부로 활동
이씨는 무시할 수 없었다. 노조 창립이 무산되면 이들은 보복 차원에서 해고당할 게 뻔했다. 그는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했다. 노동 야학을 하면서 노동관계법 등을 공부했다. 이씨는 동료 4명을 데리고 참석했다.
이 일은 그를 노동운동의 한복판으로 이끌었다. 이씨는 노조 총무부장을 거쳐 2년 뒤 2대 노조위원장에 취임했다. 하지만 그는 투쟁, 대립이 아니라 타협과 합리성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2년을 끌어온 단체협약을 원만하게 마무리 지었다.
이것이 소문나면서 그는 상급단체로 불려갔다. 노조연맹에서 간부로 일하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민노총 출발의 교두보였던 전국사무금융노조연맹을 조직하기도 했다. 파급 효과는 컸다. 언론노조연맹, 병원노조연맹 등 20여개가 잇따라 설립됐다. 그는 87∼97년 10년 동안 임금교섭단체협약국장, 교육국장 등으로 일했다.
이씨는 97년 외환위기도 온몸으로 겪었다. 그해 집안에 큰 사건이 터졌다. 사업하던 형제가 부도를 냈다. 이씨를 비롯해 여러 형제가 대출 보증을 섰던 것이다. 이씨는 노조연맹 일을 그만두고 빚 청산에 매달렸다.
“어떤 이들은 빚 때문에 도망갔어요. 어떤 이들은 신용을 포기했어요. 하지만 그 알량한 재산을 지키자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어요. 덕분에 집마저 잃었죠. 전세 보증금도 없어 경기도 일산까지 왔어요.”
경제적 타격이 심각했다.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건전한 직장인으로 산 대가가 이것인가’라며 자괴감에 빠졌다. 불면증 우울증에 시달렸다.
빚보증으로 전 재산 날려
이뿐만이 아니었다. 직장에서는 대량 해고가 진행됐다. 수백명이 감원됐다. 그는 대상에 포함되진 않았지만 남은 자로서 힘들었다. 살아남아 총무인사부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나 내부통제자(준법감시인) 등에 임명되면서 회사와의 마찰도 잦았다.
2007년 대학생 큰딸이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미국 밴더밸트대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다. 상황은 심각했다. 뇌를 다쳤다. 사경을 헤맸다.
사방이 완전히 벽으로 둘러싸인 듯했다. 이때 그를 지탱한 건 신앙이었다. 이씨는 대학시절 창현교회에 출석했다. 하지만 신앙은 없었다고 했다. 당시 교회는 학생운동을 위한 공간이었다.
“유신 때는 기독교를 통해 민주화운동을 벌였어요. 학생운동하려고 교회 활동을 했어요. 저도 그랬고요. 그러다보니 대학 졸업과 함께 교회도 안 갔죠.”
이씨는 2003년부터 일산사랑의교회를 다녔다. 직장 선배가 소개했다. 그는 삶이 힘들수록 더 열심히 교회생활을 했다. 예배와 제자훈련은 그를 변화시켰다. 그는 소모임 ‘목장’의 리더가 됐다. 모임을 통해 전도에 열정을 보였다.
리더인 ‘목자’는 매주 금요일 저녁 태신자를 초청, 음식을 대접하면서 섬겼다. 그는 3년간 목자로 살았다. 성전건축위원장도 2년 했다. 2008년 안수집사가 됐다.
큰딸은 교통사고로 사경 헤매다 살아나
큰딸은 회복됐다.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기적이었다. 그는 일산사랑의교회와 내슈빌 한인교회, 내슈빌 뱁티스트교회 등 미주 한인교회 교인의 중보기도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5억원 가까이 나온 병원비도 교인들의 도움으로 대부분 해결했다. 축복이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니던 큰딸은 자신감을 찾고 싶다며 미스 유니버시티 한국대표에 도전했다. 지성과 미모로 한국을 알리는 20명에 당당히 뽑혔다. 지금은 대한항공에서 근무한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정년퇴임했다. 은퇴자는 대부분 막막하고 불안하다. 가정에서도 왠지 겉돌게 된다. 회사일에 바빴던 베이비부머에게 가정은 어색한 공간이다. 그 불안과 어색함을 지우기 위해 은퇴자 대부분이 밖으로 떠돈다.
이씨 역시 막막하고 불안했다. 하지만 신앙이 있었다. 이씨는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새벽기도회에 나갔다. 새벽기도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하림교회로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어학원을 맡아 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들어 왔다. 기도모임의 한 멤버가 어학원의 전 원장이었다. 사업 때문에 해외에 나간다고 했다.
이씨는 아이들, 교육 등에 관심이 많았다. 2년 동안 교회학교의 담당 안수집사를 하기도 했다. 고민 끝에 올 1월 원장으로 취임했다. 부족한 자금은 대출을 받았다. 유치원생, 초등학생이 주축인 영어학원이다. 유치부 초등부 중등부 등 130여명이 회원이다.
힘 빼면 나만의 영적 DNA 알 수 있어
많은 지인들이 “웬 학원이냐”고 묻는다고 한다. 손보업계에서 30년 일한 경력뒀다 뭐할 거냐는 말도 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이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학원이 이씨한테 맞을 것도 같네”라고 말한다.
“제 생각에도 전혀 다른 직종을 도전하는 게 제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죠. 하나님은 제 새 인생을 위해 필요한 DNA를 알고 계셨어요. 제가 몸에 힘 빼고 하나님께 매달리니까 그 DNA를 가르쳐 주신 것 같아요.”
그는 “많은 은퇴자가 현직에서 하던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오히려 마이너스”라면서 “자기에게 숨겨진 영적 DNA를 찾아 블루오션을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능력과 경력을 믿는 것은 교만”이라며 “신앙이 있는 이들은 먼저 자기를 비우고 자기의 힘을 먼저 빼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베이비부머들을 위한 교회 프로그램이 아쉽다는 말도 했다. 현재 프로그램들은 주로 70세 이상에 맞춰져 있다. 이제 막 은퇴해 불안한 이들을 돌보고 전도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씨의 비전은 지역을 섬기는 것이다. 그는 어학원이 이를 위한 믿음의 통로라고 말했다. 일단 그는 지역 저소득층 아동 5명에게 장학금을 줘 영어를 무료로 가르치는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 베이비부머
6·25전쟁이 끝난 1955년부터 산아를 제한한 63년까지 태어난 사람들을 말한다. 7080세대인 이들은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급격한 경제성장,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것을 소진하고 은퇴 이후를 준비하지 못한 세대다. 전체 인구의 14%를 웃돈다. 이에 따라 이들의 부양이 사회·경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글 전병선 기자·사진 이동희·구성찬 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