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일보 선정 아름다운 교회길] (10) 거창 가북교회
입력 2011-02-23 17:53
지리산 자락 지방도로. 경운기 한 대가 느릿느릿 움직였다. 뒤에 차가 있음을 뒤늦게 안 노인이 먼저 가라며 손을 앞뒤로 휘젓는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앞지른 뒤에도 노인은 그 주름 팬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이번엔 맞은편에서 차가 들어왔다. 길 양쪽 끝에서 서로 먼저 가라고 손짓하며 한참을 옥신각신했다. 운전자는 큰 소리로 웃으며 “고맙소” 외쳤다. 웃음이 밝았다. 교회로 가는 길이 아름다웠던 건 경치, 그리고 따뜻한 인심 때문이다.
20일 찾은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 가북교회의 십자가가 우뚝 솟은 곳이다. 교회는 별유산과 보해산 사이에 꼭꼭 숨어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던 교회는 산모퉁이를 돌자 붉은색 자태를 드러냈다.
교회 앞 논밭은 한 해 농사의 새로운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사리를 키우는 밭이었다. 봄·여름이면 온 교회에 고사리향이 흘러넘친다. 이곳은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 3개 국립공원의 중간 지역이다.
2층 예배당에 들어섰다. 이날따라 따사로웠던 햇살이 창문을 넘어 예배당에 퍼졌다.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 안에 충만한 느낌이었다. 예배 시간 내내 40여명 교인의 얼굴엔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노인부터 막내 송안식(5) 어린이까지 모두 장영춘(56) 담임목사의 설교에 귀를 세웠다.
오전 예배가 끝난 뒤 1층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나눴다. 김희규(61) 장로는 큰 접시에 밥을 한 가득 담아줬다. “많이 먹는 게 나라 사랑하는 것이여.” 차린 게 없다며 미안해했지만 밥과 반찬은 교회 앞산처럼 높았다. 교인들은 앞 사람, 옆 사람 접시에 반찬을 얹었다. 외부인에게만 인심이 후한 게 아니었다.
거창 지역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904년이다. 그해 가을 박순명 김종한 등 10명이 미국 스미스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듣고 고제면 개명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후 1906년 가조면 마상리교회(현 가조교회), 1907년 남하면 가천교회, 1909년 신원면 와룡리교회 등이 잇따라 세워졌다.
가북교회가 세워진 건 1934년 10월 14일이다. 최성환 전도사가 마을 주민 백남순의 집을 빌려 첫 예배를 올렸다. 최 전도사는 이듬해 3칸짜리 초가 예배당을 지금 자리에 지었다. 교회 요람은 ‘일제시대, 어둡고 암울한 시기였지만 하나님을 향한 초가 교회의 부르짖음은 온 동네에 울려 퍼졌다’고 기록했다. 교회는 이후 76년간 세 번의 성전건축을 거치며 세월의 풍파를 견뎠다.
교회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인 거창양민학살사건을 가까이서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10일과 11일 인근 신원면에서 대량 양민학살이 일어났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1·4후퇴가 시작된 뒤 빨치산 공세가 강화됐는데 국군은 신원면 주민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중화기를 난사했다. 당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는 136명(10일), 527명(11일) 등 총 663명을 죽였다. 골짜기에 피가 넘쳤고 이웃을 잃은 주민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김재원(77) 장로의 증언.
“낮에는 국군이 밥 달라 하고 밤에는 인민군이 산에서 내려와 밥 지으라고 협박을 했지요. 뭐 할 수 있는 게 있나. 밥 내놓지 않으면 죽이겠다는데…. 윗동네 할머니는 빨치산이 밥 내놓으라고 해서 줬더니 다 먹고 총으로 쏴버리는 바람에 돌아가셨어. 다 억울하게 죽은 거지.”
교회 앞 고사리밭 사잇길은 예전 국군과 인민군이 낮과 밤을 달리해 마을을 드나들었던 길이기도 했다. 김 장로가 당시를 떠올렸다. “기도밖에 할 게 더 있었겠어. 죽지 않게 해달라고, 교회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렸지. 결국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회를 지킨 거야.”
그는 교회 앞으로 나가 당시 인민군이 내려왔던 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길 건너 별유산의 능선 사이가 주요 루트였다. 아직 눈이 쌓여 있는 산에서 이 사건을 다룬 김원일의 소설 ‘겨울골짜기’(1987)의 음산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소설은 반전과 휴머니즘의 시각으로 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환기시킨 작품이다. 이곳 60대 이상의 노인은 소설 속 비극적 상황을 실제로 겪었다.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마음 속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오로지 신앙이었다.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흥미로운 것이 있었다. 토속어와 사투리가 말에 녹아 있었다. “김 집사는 왜 이리 눈을 슴벅이는가(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가)?” “교인 몇 분이 안 오시니 허우룩혀(마음이 텅 빈 것 같아 허전하다).”
소설 ‘겨울골짜기’는 지역 토속어와 사투리를 써 현실감을 더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단어를 직접 접할 때의 신선함,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북교회 만의 또 다른 매력이다.
지금의 성전은 2007년 4월 8일 세워졌다. “전도가 잘 되냐”고 묻자 교인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기독교가 들어온 지 100년이 넘었지만 거창의 기독인구는 6000여명에 불과하다. 복음화율 8%. 이 교회 염길생(57) 장로는 전도에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했다. 장 목사는 원인으로 대형 사찰의 존재를 꼽았다.
“불교문화권이잖아요. 30㎞만 더 가면 합천 해인사가 있습니다.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세가 험하다보니 신 내림을 받아 무당이 되는 사람도 많고요, 큰 사찰이 주변에 많다는 것은 그보다 규모가 작은 절이 그 인근 이곳저곳 생기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죠.”
실제로 교회길 주변에 절과 암자가 산재했다. 하지만 교인들은 희망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적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염 장로는 2004년 뇌졸중으로 몸의 왼쪽이 마비됐으나 “제가 쓰러지면 성전 건축은 누가 합니까. 고쳐주옵소서”라 기도한 뒤 완전히 회복해 교회 건축을 마무리했다.
노을년(62) 집사는 교회에 출석하기 전 남편 강쌍규(63) 집사의 알코올중독으로 마음고생을 했다. 다섯 번에 걸친 수백만원짜리 굿도 효험이 없었다. 죽음을 눈앞에 뒀던 강 집사는 “마지막으로 갈 데가 한 군데 남았다. 교회 가자”며 이 교회길을 밟았다. 이들에게 이 길은 역사의 길이고 기적의 길이었다.
교인과 인사를 나누고 교회를 떠날 때 김옥분(52) 사모가 급히 뛰어 나왔다. 양손에 비닐봉투를 들고 있었다. 거창 사과와 강냉이가 한 가득이었다.
거창=글 조국현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ojo@kmib.co.kr
■ 가북교회 가는 길
서울에서 거창군까지 동서울터미널에서 하루 8편의 고속버스가 있다. 소요시간은 3시간30분. 거창버스터미널에 내려 북부주유소를 바라보고 10분 정도 걸은 뒤 새천년약국 앞에서 서흠여객버스를 타면 된다. 가북면사무소 정류장에 내려 5분 정도 걸으면 교회가 보인다.
자가용으로 갈 때는 서울을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와 대전∼통영 고속도로, 88올림픽고속도로를 거쳐 가조IC로 빠져나가 1099번 국도를 이용하면 된다. 경남 거창군 가북면 우혜리 1718번지(055-942-2004).
■근처 맛집 정희오리불고기
88올림픽고속도로 거창IC를 빠져나와 3㎞ 지점, 거창읍사무소 뒤 상동지구에 시누이와 올케가 운영하는 오리주물럭 전문점 ‘정희오리불고기’(055-942-2388)가 있다.
김정희(52)씨가 주방을, 인심 좋게 생긴 김씨의 올케 석미자(48) 집사가 밑반찬 및 손님 식탁을 챙긴다. 김씨가 수년간 공들여 개발한 소스와 신선한 재료, 알맞게 숙성된 오리로 버무린 주물럭은 이 집의 대표 요리다.
먼저 오리탕에 찹쌀과 팥 녹두 인삼 부추 흑미 흑깨 당근을 넣고 끓여낸 영양죽으로 속을 달랜다. 고기가 익으면 송이 느타리 팽이버섯과 부추 냉이 등 야채를 고기와 함께 먹는데 그 맛이 일품이다.
오리불고기는 자작하게 졸여지면서 진가가 발휘된다. 오리 특유의 부드러우면서도 차진 고기 살에 양념이 진하게 배어들어 감칠맛과 향이 입안에 감긴다. 오리고기는 불포화지방산이라 탈이 나지 않고 건강에 이롭다.
고기를 먹고 나면 남은 양념에 밥과 김, 송송 썬 깻잎, 묵은 김치를 넣고 비빔밥을 해 먹을 수 있다. 오리뼈를 고아 우려낸 곰탕은 감기와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청정 지역인 이곳에서 생산된 배추와 무로 담근 김치는 그야말로 최고의 반찬이다. 석 집사의 정성이 담긴 다른 밑반찬 역시 하나같이 야무지다. 지난해 야채파동 때도 푸성귀를 넉넉히 상에 올려 단골손님이 더욱 많아졌다.
오리불고기 가격은 3만∼4만원 선이지만 늘 정량 이상을 상에 올린 단다. 오리로스와 오리훈제는 각 2만5000원이다. “식당을 그대로 들고 대구나 서울로 나가도 대박 나겠다”는 손님들의 칭찬에 두 사장은 지금 행복한 고민 중이다.
글·사진=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