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선 약사의 미아리 서신] 어린 희야씨의 작은 고백
입력 2011-02-23 17:37
미아리 집창촌 여성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철없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왜 위대하신 분인지도 알게 되었죠. 아버지의 뜻이 아닌 제 뜻으로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했던 지난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교만했던 저의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제게 ‘희야’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 친구를 보내셨습니다. 중학교도 채 마치지 못하고 집을 나와 어린 나이에 여기저기 헤매다 이곳까지 들어온 아이. 몸 안에 칼을 품고 사는 아이였지요. 마치 세상과 한판 전쟁이라도 할 것 같은 날카로움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몸 안에 칼을 품고 사는 아이
이 동네 아이들은 혼자 다니질 않습니다. 어두울 때, 어두운 곳에서 일을 하고 햇살보다는 붉은 형광등 조명이 더 익숙하기에 볕을 받고 나가는 걸 불편해 하지요. 항상 두서너 명이 함께 다니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약국에 올 때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희야씨는 늘 혼자였습니다. 깨끗이 화장을 지운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수면제를 달라고 짧게 말했습니다.
“이런 약은 이렇게 계속 먹으면 안 돼요. 약에 중독이 되기 쉬우니까…. 왜 잠을 못 자는지 원인을 치료해야 해요. 병원도 가보고 다른 약도 먹어보고….”
“됐어요. 얼마예요.” 그녀에게 몇 마디 말을 붙여보았지만 매몰찬 퉁을 줄 뿐이었습니다. 거의 매일 약을 사러오는 그녀와의 대화는 늘 같았습니다.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는 그녀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츰 제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날로 핏기를 잃어가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말라가는 몸이 눈에 밟혀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오래전 그녀가 어떤 문제가 있어 어떤 사고를 치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흠집투성이인 그녀가 이곳으로 들어오고, 많은 약국 중 제 약국을 찾게 된 것. 제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잔뜩 날이 서 있는 그녀를 제게 보내주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등을 휙 돌리고 나가는 희야씨에게 “건강해요, 평안해요, 잘 가요” 하는 인사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힘들어 약국까지 나오지 못하는 날엔 대신 나온 주방이모에게 안부를 묻기도 했습니다. 밥보다 술을 더 자주 먹는다는 이야기, 약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더 다가가고 더 많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쯤 지난 뒤 드디어 희야씨가 제게 말을 건넸습니다. 몸이 많이 힘들다고 어찌해야 하냐며 그녀는 제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녀가 세상으로 나오고자 조심스레 발을 떼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간 기능이 약해져 있었고, 위장도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약을 먹으면서 술을 끊기로 하였으나 그에겐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술병을 향해 가는 자신의 손이 너무 밉다고 고백했습니다. “혼자 하려고 너무 애쓰지 말아요. 지금까지 당신은 힘들게 버텨 왔잖아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당신은 잘 하고 있는 거니까 이제 도움을 받아요.”
혼자 넘으려고 했던 제 삶의 신산한 언덕을 무릎 꿇고 복종하여 여기까지 왔노라고 저의 작은 고백을 들려주었습니다.
미용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저는 기도할 줄 몰라요.” “그냥 이야기해요, 뭐가 힘들고 어려운지. 아버지에게 나 힘들다고 투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아뢰어 봐요.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다 털어놓아요.” 그녀와의 이야기는 조금은 무겁고 아프게 이어졌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살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물어보지 않았답니다. 그저 살아 있어줘서 고맙노라고 그녀를 어루만지고 안아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술을 완전히 끊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는 많이 건강해졌습니다. 세상에서의 당당한 삶을 위해 미용사 자격증도 땄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