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유리천장’ 금 가기 시작했다… 기업 여성임원 할당제, 유럽 전역 확산

입력 2011-02-22 17:53


“이건 스캔들 수준입니다.”

독일 베를린에서 지난 8일 열린 가족부 주최 여성 관련 행사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성 임원을 꺼리는 대기업에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면서 “기업이 스스로 개선할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고 몰아세웠다. 도이치뱅크AG의 요제프 아커만 최고경영자가 “이사진이 보다 화려해지고 예뻐지도록 하겠다”고 시니컬하게 반응해 논란의 분위기를 더욱 달구고 있다.

영국에서도 이번 주 나올 여성 중역 확대 방안을 담은 ‘머빈 데이비스 보고서’를 놓고 업계가 술렁이고 있다. 보고서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지시로 지난해 여름에 작업을 시작했었다.

유럽에서 여성임원(이사) 할당제 논란이 뜨겁다. 독일 영국 등 각국 차원은 물론 ‘상부조직’인 유럽연합(EU)도 지원사격에 나섰다.

◇유럽, 페미니즘에 빠지다=여성임원 할당제는 노르웨이(2003), 스페인(2007)이 먼저 시작했다. 한동안 뜸하더니, 올 들어 지난 1월 프랑스가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독일 영국 등으로 불길이 번지는 모양새다.

독일에선 녹색당이 연초 기업 이사회 구성원 40% 이상을 여성에게 할당하는 내용의 법안을 제안하면서 논란이 점화됐다. 법으로 바로 강제하느냐, 기업 자발성에 좀 더 맡기느냐를 두고 여야가 격론을 벌이는 중이다. 메르켈 총리는 기업에 2년 유예기간 뒤 법적 의무를 부과하자는 입장이다. 연정 파트너인 친기업적 자민당을 의식한 것이다.

영국에선 머빈 데이비스 전 통상장관이 이끄는 정부 패널이 24일 최종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보고서는 “대기업들이 법적 강제 없이 자율적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2015년까지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을 30%까지 채우도록 권고할 것이라고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가 20일 보도했다. 업계는 날을 세우며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네덜란드도 기업 이사회에 여성 30% 이상을 채우는 법안이 의회에 제출된 상태다.

EU도 목소리를 높인다. EU 법무담당 집행위원 비바네 리딩은 최근 미국 CNN과의 인터뷰에서 “3월쯤 여성 고위직 중용 방안과 관련해 업계 지도자들과 회동할 것”이라고 말했다. EU는 기업 내 여성임원 비율을 2015년까지 30%, 2020년까지 40%로 단계적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권고하고 있다.

1월 말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참석자 여성쿼터제가 처음 도입됐다. 가히 유럽 전역이 ‘유리천장’ 깨기에 매진하는 상황이다.

◇사정이 어떠하길래=영리가 목적인 기업의 풍토는 여성에게 척박하기 그지없다. 독일의 경우는 더 그렇다. 첫 여성총리가 나오고 각료 3분의 1이 여성이지만, 독일 대기업의 여성이사 비율은 2010년 8.5%로 유럽 평균 11.7%에 못 미친다. 영국은 13.5%로 사정이 낫지만 유럽 1위 노르웨이의 37.9%에 비하면 크게 떨어진다.

유럽전문직여성네트워크(EPWN)의 조사 결과, 유럽 내 기업들의 여성이사 비율은 2004년 8%에서 2010년 11.7%로 개선되고 있다. 각국이 법안을 마련하거나, 금융위기 이후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 노력이 더해지고 있어서다.

유럽의 여성임원 비율은 미국의 15.2%(2009)보다 낮다. 하지만 일본의 1.4% 등 아시아권보다는 월등히 높다. 한국 100대 기업의 여성임원 비율은 2009년 말 현재(노동부 자료) 1.1%였다.

◇효과, 증명됐나=여성임원 할당제가 기업의 성과로 이어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 미시간대는 2009년 9월 노르웨이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사진이 젊어지고 경력이 짧아지면서 실적이 줄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노르웨이에서 최근 나온 첫 평가는 “기업이 우려했던 혼란이나 폐해는 없었다”였다. 오슬로 소재 기업다양성센터는 “좋은 기업들은 단기적으로 대차대조표가 나빠졌지만 이내 회복됐고, 실적이 나빴던 기업들은 오히려 개선됐다”고 발표했다고 독일 슈피겔이 지난 16일 보도했다.

이 제도가 기업문화에 끼치는 영향은 더욱 긍정적일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한국 여성정책연구원 양인숙 박사는 “기업 이사회에 성적 다양성이 갖춰질 경우 21세기 기업 과제로 인식되는 독립성, 정직성, 새로운 경험과 관점 도입에 도움이 된다”고 지적했다. EU 마켓담당 집행위원 마셀 바르니에는 “이건 형평성 문제가 아니다. 국가나 지역, 기업에 여성 리더십의 존재는 굿 거버넌스(good governance)의 문제”라고 말했다.

미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촉발된 이후 “리먼 브러더스(brothers)가 아니라 리먼 시스터스(sisters)였다면 위기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