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2월에 보내는 편지
입력 2011-02-22 18:04
열두 달 중에서 이삼일이 부족한 달. 2월입니다. 뭔가 다 못 찬 것 같아 그런지 애잔해집니다. 다섯 손가락 중 짧은 새끼손가락 같습니다. 막내 같기도 합니다. 젊고 아름다운 부모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태어나, 부모의 보살핌보다 동기간 그늘 속에 자라는 막내 같습니다. 그래서일까, 이월에는 이별의 아쉬움과 출발의 설렘이 들어있습니다. 정들었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미지의 세상으로 향하는 두근거림이 있어 하루하루가 여느 달의 하루보다 더 귀하게 느껴집니다.
입춘 지나 내린 눈이 2월의 햇살에 녹아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옷을 적실세라 마른 땅을 골라 걷습니다. 한때는 겨울의 서정으로 도시를 푸근하게 감싸주던 백설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마른 가슴을 녹여주기도 했습니다. 2월의 눈은 천덕꾸러기입니다. 때를 놓치고 달려와 발을 구르다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못난이 같습니다. 가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떠나야 하는 것을….
경춘선 전철을 타고 북한강에 다녀왔습니다. 강변에서 얼음이 풀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누군가 꽁꽁 언 강 위에 던졌을 돌멩이들이 깊은 강 한가운데로 내려앉는 소리도 들려오는 듯했습니다. 봄이 오는 강물은 강변에 길게 늘어선 포플러 나무들도 비쳐내고 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주었습니다. 겨우내 잠들었다 기지개를 켜는 내 모습이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긴 겨울 숨죽였던 발가락도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나봅니다. 구두 밖으로 삐죽이 나온 발가락을 숨기며 구두를 사러 갔습니다. 낡고 뜯어진 구두를 신은 나는 영락없이 겨울에 쫓겨 가는 이월의 모습이었습니다. 점원은 은색 겹리본이 반짝이는 구두를 내놓았습니다. 리본 장식이 겨울 하늘에 빛나는 별 같아 집어 들었습니다. 은하계에서는 별이 별을 낳는다고 합니다. 별이 폭발하면 그 잿더미 속에서 중성자별이 태어납니다. 구두 위에 내려앉은 이 중성자별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요?
헌 구두는 뒤꿈치가 비뚜름히 닳았지만 편안했습니다. 겨우내 빙판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나를 부끄럼 없는 직립인간으로 서게 해주었습니다. 새 구두를 신고, 종종 박물관에 들를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찻잔도 마주하고, 발을 구르며 시외버스도 기다릴 겁니다. 제비꽃이 점점이 이어지는 우체국 언덕길을 내려가 편지도 부칠 겁니다.
전철의 플랫폼에 섰습니다. 기차가 철로를 지날 때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 음향의 여운이 길어집니다. 전철 역사를 받치는 기둥 그림자 길이도 길어집니다. 무형의 그림자가 키를 키우듯 저도 한 곳에 머물지 않고 자신을 키워야겠습니다. 끝없이 뻗어나간 철길을 바라보며 누군가 올 것 같은 기다림을 가져봅니다. 잊을 수 없었던 사람과 극적인 해후라도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봄빛을 잡기라도 하듯, 사람들이 거리로 활보하기 시작합니다. 멀리 희미하게 보이던 산이 큰 발자국으로 다가옵니다. 겨우내 기다림으로 쌓은 설산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