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밥과 밥그릇

입력 2011-02-21 20:17


찐 라면에 국물을 부어주고 깍두기 3개를 훈련병에게 주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초반 육군 논산훈련소에서다. 당시 논산훈련소는 일주일에 한 번씩 예외 없이 찐 라면을 배식했다. 식사 인원이 많다 보니 불지 않게 하려고 찐 라면에 국물을 부어준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고춧가루가 거의 붙어 있지 않아서 이름만 깍두기인 것을 달랑 3개만 준 것은 심했다는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나서 끓인 라면에 김치를 곁들여 먹은 것과 비교하면 찐 라면은 생각하기도 싫은 메뉴였다.



군대 짬밥도 별로 먹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교도소 콩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수뢰혐의로 구속수감된 국세청장 출신의 한 인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다가 영어의 몸이 됐으니 교도소 생활과 음식 때문에 고생했을 것이다. 결국 그는 민원을 해서 일과시간에 교도소 외부에서 작업하는 화훼반에 들어갔다고 한다. 화훼반은 닫힌 생활에 염증을 느낀 재소자들이 선호하는 일 가운데 하나. 교도소 밖에서 작업을 하면 다소 자유로울 수 있고, 짬짬이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짬밥 좋아하는 사람 있을까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 건평씨도 교도소 콩밥이 입에 맞지 않은 모양이다. 지난해 광복절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건평씨는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자택으로 찾아간 지방주재 기자에게 콩밥에 관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정부에서 주는 밥보다 역시 집사람이 해 주는 밥이 좋네요.” 20개월 넘도록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났으니 그리운 가족들과 밥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큰 행복인지 절절이 느꼈으리라.

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모든 행위가 어찌 보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모든 이들에게 밥이 중요한 것처럼 권한의 확대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밥그릇 싸움의 경우 당사자들에게는 밥그릇이 밥 못지않게 중요하다. 거의 불퇴전의 각오로 임한다. 환경부는 보사부에서 분리된 뒤 환경청을 거쳐 장관급 부서로, 공정거래위원회는 경제기획원 안에 있다가 차관급 기구로 독립된 뒤 장관급 부서로 격상됐다. 두 부처 모두 분리되는 과정에서 권한과 기능을 줄이려는 보사부와 기획원을 상대로 ‘투쟁’을 했다고 관리들은 말한다.

최근 헌법 개정 논란 와중에 표출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갈등도 밥그릇 싸움과 무관하지 않다. 대법원과 헌재의 해묵은 갈등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은 김황식 국무총리. 김 총리는 지난달 25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법원과 헌재의 역할 조정도 헌법상 문제”라고 말했다. 헌법은 위헌 법률 심판, 탄핵 심판, 정당 해산 심판, 국가기관 등의 권한쟁의 심판, 헌법소원 심판 등 5개를 헌재의 관장 사항으로 압축해 놓고 있다.

총리실이 “두 기관의 역할 조정에 대한 법조계의 문제의식을 전달한 것일 뿐”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헌재는 김 총리의 진의를 의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대법관 출신인 김 총리가 헌재를 흡수통합하려는 대법원 입장을 대변했다고 본 것이다. 급기야 헌재는 지난 8일 예정됐던 김 총리와 헌재 재판관들의 만찬까지 전격 취소했다.

대법원-헌재, 갈등 접어야

대법원은 헌재가 정치적 사법기관으로 3권 분립 취지에 맞지 않고,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로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는 등의 이유로 헌재 흡수통합을 원하고 있다. 반면 헌재는 대법원 주장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로 역주행하자는 것이라면서 헌재 권한을 확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두 기관은 외국 사례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강조하고 있다. 두 기관의 법률 해석이 다른 데 따른 혼선을 막기 위해 역할 조정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지금은 개헌 논란에 두 기관의 밥그릇 싸움까지 얹을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것인지 고민할 때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