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공개 한국정부, 김정일 후계자 등극때 "과격하고 고집 세" 평가
입력 2011-02-21 04:40
우리 정부가 198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후계자로 공식 등극할 당시 “과격하고 고집이 세며 모험주의적 성격으로, 두뇌가 명석한 편”이라고 분석한 것으로 나타났다. 75년 월남 패망 이후 억류된 우리 외교관 3명과 국내 수감 중인 간첩과의 맞교환을 추진했던 사실도 확인됐다. 외교통상부는 20일 80년도 문서를 중심으로 총 1300여권(약 18만쪽) 분량의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31년 전 김정일 평가=정부는 80년 북한의 제6차 당대회 동향분석 문서에서 김일성 주석의 후계자로 공식 등극한 김 위원장이 북한의 실질적인 2인자로서의 역할 수행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당 중앙위 비서국(1순위)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4순위) 정치국 위원(4순위), 군사위원회 위원(3순위) 등 무려 4개의 요직에 공식 임명돼 김일성의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외교부는 당시 각 재외공관에 김일성 발언과 후계체제에 대한 현지 언론의 비판 기사 보도를 위한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세계 각국 언론은 북한의 김정일 후계 지목을 ‘공산왕조의 출현’이라며 일제히 보도했다. 최근 김정일의 삼남 김정은이 후계 지목을 받은 것과 비슷한 논조의 보도가 잇따랐던 셈이다.
일본 마이니치신문은 ‘세계 최초의 부자권력 세습’라는 제목의 보도를 했으며, 산케이신문은 ‘족벌정치체제 출연으로 인한 80년대 동북아 정세 영향’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또 영국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김일성 일가의 족벌정치 출연’으로 보도했고, 미국 보스턴글로브는 ‘세계 최초의 공산 왕조 등장’이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후계세습을 알렸다.
◇한국, 억류 외교관과 간첩 맞교환 추진=75년 월남 패망 이후 우리 대사관원 8명과 교민 150명은 교통편을 구하지 못해 사이공(현 호찌민)에 잔류하게 됐다. 베트남 공산정부는 이 중 이대용 공사와 안희완 2등서기관, 서병호 주재관 등 한국 외교관 3명을 체포해 사이공 치하오 형무소에 수감했다. 미국은 한국인 철수를 위해 미 해병대를 파병해 달라는 우리 측 요청을 거부했고, 잔류 한국인 구출 요구에 “일본, 프랑스 대사관에 알아보라”며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정부는 이들 외교관 석방을 위해 모든 외교 채널을 총동원했지만 북한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베트남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77년 말 프랑스 정부를 통해 외교관 3명과 국내에 수감된 북한 간첩과의 맞교환을 제안했다. 북한은 이에 동의하며 우리 정부가 석방할 간첩 명단과 조건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후 교환 협상은 더 이상 진척되지 못했고, 북한은 공작원 2명을 베트남에 파견해 이들 외교관을 상대로 망명서 작성을 강요하는 등 납북 시도까지 했다.
사태가 해결된 데는 스웨덴 정부의 역할이 컸다. 정부는 베트남 정부와 소통이 원활했던 스웨덴 정부와 접촉해 석방 해결의 전권을 사실상 위임했다. 스웨덴 정부의 중재 노력 등으로 3명의 외교관은 80년 4월 11일 석방됐다. 당시 라이프란드 스웨덴 외무차관은 사이공에서 이들을 인계받아 김포공항까지 동행했다. 한국 정부는 라이프란드 외무차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했다.
◆김대중 석방 전후, 숨 가빴던 한·미·일=80년 신군부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동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연행해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같은 해 7월 4일 육군본부 검찰부에 송치한 직후 우리 외무부는 일본 주재 각 공관에 “김대중 구명 시위 및 집회를 적극 저지 및 약화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지시에 따라 일본 주재 각 공관은 민단 등을 동원해 일본 내 반한 인사를 설득하거나, 기자들을 동원한 ‘김 빼기 작전’ ‘맞불 시위’ 등을 조직·실행했다.
미국과 일본은 이런 한국 정부를 다각도로 압박했다. 미 의회는 김 전 대통령의 구명을 위해 군수물자 판매 유보와 경제협력 중단까지 거론했고, 미 행정부는 유죄 판결 시 김 전 대통령의 피난처를 제공하겠다는 의향도 밝혔다. 일본 역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과 관련한 한·일 결탁 의혹으로 여론의 공격을 받자 북한과의 교류 확대 가능성을 언급하며 한국 정부를 압박했다.
이성규 기자 zhibag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