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사업에 갈라지는 한국-신공항] “우리 지역으로 죽기살기로 뺏어와야지예”
입력 2011-02-18 18:54
“동남권 신공항예? 가덕도밖에 더 있는교. 죽기 살기로 뺏어 와야지예.”
18일 오후 1시 서울행 경부 고속철(KTX)을 타기 위해 부산역에 온 김정숙씨(65·여)는 신공항 입지에 대한 의견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같이 답했다.
부산역 광장은 지난달 27일 2만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동남권 신공항 가덕도 유치 범시민 궐기대회’를 가진 뒤 신공항 유치 관련 현수막과 선전탑, 배너 광고로 온통 도배됐다. 부산시와 자치구들이 자유총연맹, 새마을협의회, 주민자치위원회 등 관변단체들을 동원해 무차별 광고공세를 벌인 탓이다.
‘신어산 추락사고 잊었나 첩첩산중에 공항이 웬 말이냐’, ‘탁 트인 바다 두고 꽉 막힌 산속으로 가자고?’ 등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문구 일색이었다. 부산도시철도 부산시청역 지하차도에도 동남권 신공항의 가덕도 유치를 홍보하는 각종 배너와 전시판이 새로 세워졌다. 총성만 없을 뿐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맞불을 놓듯 대구시내 곳곳에도 시민 궐기를 부추기는 문구의 현수막이 내걸렸다. 서울의 종각처럼 대구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달구벌 대종 주변은 100여개의 현수막이 단단한 옹벽을 쌓은 듯 겹겹이 붙어 있었다. ‘영남민심 폭발했다. 영남민심 무시하면 영남민심 봉기한다!’, ‘바다 위 공항건설 전 국민이 분노한다’ 등 문구도 살벌했다.
대구시의회 동남권 신국제공항 밀양유치특별위원회 오철환 위원장과 정순천 의원은 지난 14일 시의회 본관 앞에서 신공항 조기입지 선정을 촉구하는 삭발식을 열기도 했다. 주민 이성순(52·여·동인동)씨는 “이번 기회에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한번 보여주자’는 말이 많다”면서 “밀양에 신공항 유치가 안 되면 주민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동남권 신공항 입지선정이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오면서 영남권은 지자체뿐 아니라 지역 주민들 간의 갈등도 커지는 양상이다. 혈세 낭비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지자체들이 홍보매체를 총동원해 상대지역 흠집 내기에 몰두해 온 결과다.
부산시의회에 따르면 부산과 대구, 울산, 경남북 등 5개 시·도가 신공항 유치 홍보에 사용한 예산은 무려 26억여원이다. 지난해 신공항 관련 예산으로 5억원을 사용했던 대구는 올해도 4억원을 신공항 관련 예산으로 책정했다. 경북은 지난해 1억원에서 올해 5억원으로 늘렸다. 부산과 경남도 올해 각각 수억원에 달하는 신공항 유치 홍보 예산을 별도 책정했다.
해당 지자체들은 모두 겉으론 ‘객관적·경제적 타당성이 최우선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정치적 세대결을 벌이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의 ‘1000만명 서명운동’과 부산의 ‘구청별 홍보’가 대표적이다.
이처럼 신공항 유치 홍보가 지역이기주의를 부추길 정도로 과열되면서 세 과시를 위한 무리한 행정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한쪽에서 신공항 유치 결의대회에 공무원과 주민들을 대거 동원하자, 다른 쪽에선 이에 뒤질세라 버스를 대절해 주민들을 모아 행사장까지 실어 나르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에서 살다가 현재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이모(25)군은 “처음에는 신공항 건설에 대해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덜했는데 지자체들이 네거티브 전략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면서 이 꼴이 됐다”고 혀를 찼다.
부산에 살고 있는 아들 집을 찾아온 김모(60·대구 황금동)씨는 “소문으로 듣기는 했는데 실제 와 보니 더한 것 같다”면서 “영남 사람들이 이렇게 두 패로 나눠 싸울 바에야 신공항을 아예 짓지 않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부산·대구=글·사진 윤봉학 김재산 기자 byy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