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권 시인 여덟 번째 시집 ‘고요로의 초대’
입력 2011-02-18 17:33
조정권(62) 시인은 20여 년간 몸담았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물러나 지금은 경희대와 고려대 대학원에서 후학을 가르친다. 중앙대 영어교육과 졸업이 그의 최종 학력이니, 학사 학위를 가지고 박사과정 학생들을 가르칠 만큼 그의 신망은 학계에서도 두텁다. 자택이 서울 월계3동인지라 그는 석계역 부근에서 제자나 후배 시인들과 어울려 조촐한 술좌석을 갖곤 한다.
그때마다 그는 ‘도심 속 은둔자’라거나 ‘고독한 국내 망명자’의 체취를 풍기는데 이는 등단 40여년에 이르러서도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정신주의의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고 있는 그의 인생행로와 무관하지 않다. 이영광의 시인의 말마따나 “시인은 어쩌면 순간을 사는 자이고, 그렇기에 바로 지금 시의 섬광에 사로잡히는 영혼이야말로 행복하다면” 지금이 조정권 시인의 전성기인 것이다. 그 전성기를 확인할 수 있는 시집이 최근 펴낸 여덟 번째 시집 ‘고요로의 초대’(민음사)이다. 50여편의 시 가운데 눈길을 잡아채는 시가 있다.
“나는 가롱 강이 흐르는 투르니에 가 네거리의 한 집 앞에 선다./모퉁이 2층 돌벽/(‘프리드리히 횔덜린 1802년 머물다’)/(여기가 삶의 마지막 직장 가정교사직을 얻으러 그가 찾아온 집이구나)/표징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넝쿨에 남아 있는 응달./삶을 강요한 것은 삶/그걸 벗어나기 위해 산 삶/(중략)/나는 시인의 행적을 더 이상 찾지 않았다./책갈피 속에 끼워 둔 타마리스 꽃잎처럼/시인은 말 없음일 뿐./나는 그가 머물던 가롱 강이 안내해 주는 오솔길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돌아온 것으로 족한 것이다.”(‘보르도의 산문’ 일부)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은 선시의 대가이자 대표적 은둔 시인이었던 김달진(1907∼89) 과 독일 시인 횔덜린이다. 김달진의 동양정신과 횔덜린을 흠모하던 서양 감수성이 결합하여 탄생한 것이 그의 대표작이라 할 ‘산정묘지’ 연작이다. ‘산정묘지’는 그가 87년 간경화 말기 진단을 받은 뒤 죽음의 그림자와 싸우면서, “요양하며 사느니 시 쓰다 죽겠다”는 독한 다짐으로, 서재 독정굴(獨井掘)에 틀어박혀 5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쓴 연작시편이다.
‘산정묘지’는 한국은 물론 프랑스에서도 각광받았다.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문학면에 톱으로 실렸고 프랑스 시 전문 계간지 ‘포에지’ 1999년 한국 시인 특집호에도 실렸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그는 2006년 한·불수교 100주년 기념행사 때 프랑스 외무성의 초청으로 보르도대학에서 강연한 후 횔덜린의 자취가 묻어 있는 가옥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는 저주이자 축복이었던 횔덜린의 생애에 대한 감명을 뒤고 하고 시 ‘보르도의 산문’의 마지막 연을 이렇게 맺고 있다. “나는 그가 머물던 가롱 강이 안내해 주는 오솔길에서 잠시 길을 잃었다가 돌아온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토록 흠모했던 횔덜린의 가옥 앞에서조차 고요하게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한 저주받은 영혼이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시의 승자가 된다는 준엄한 사실을 새삼 깨달은 데 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이번 시집은 언어의 주체를 발화자인 타자에게 돌려주는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언어마저도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옛날에 나는/내 삶에/대지가 갓 발행한 파릇한 풀잎을 붙이고/나도 모르는 곳으로 나를 발송해 버렸다./하얀 나비와 함께/나도 모르는 곳으로./오랜 세월 나는 수신지 없는 편지처럼 떠돌았다./(중략)/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내 삶이 반송되었다는 것을.”(‘우표에 대한 상처’ 부분)
자신을 봉함한 채 자신도 모르는 곳으로 발송해버리는 행위를 통해 그는 자신에게 돌아와 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반송’이라는 직인이 찍힌 우표처럼 말이 없다. 봉인된 편지처럼 말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는 고요의 초대를 받고 있다.
시집 첫 머리에 앉힌 ‘은둔지’는 이런 상념을 갈무리해 보여준다. “시인은 자기가 심은 나무/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나는 나무에 목매달고 죽는 언어 밑에서/무릎 꿇고 기도한다./시인은 1인 교주이자/그 자신이 1인 신도./그 속에서 독생하는 언어./시은(市隱)하는 언어./나는 일생 동안 허비할 말의 허기를 새기리라”(‘은둔지’ 부분)
그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시끄럽고 번잡한 시가 아닌 고여 있는 시, 가라앉은 시를 쓰고 싶었다. 세속 속에서의 은둔을 뜻하는 시은(市隱)도 같은 의미”라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