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식인의 회고에 숨은 자기희화의 맥락… 김원우 장편소설 ‘돌풍 전후’
입력 2011-02-18 17:33
소설가 김원우(64·사진)의 장편 ‘돌풍 전후’(도서출판 강)는 지방사립대학에 근무하는 소설 속 화자 한 교수가 자신의 이메일로 날아든 퇴직 선배 교수 임모의 자전적 회고담을 소개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깐깐했던 임 교수는 30년 전에 경험한 여난(女難)과 국난(國難)과 교난(校難)에 대한 진솔한 자기 회고를 마치 지식인이 자기모멸을 곱씹듯 이메일에 털어놓는다. 국난과 교난이란 각각 광주민주화운동과 신군부의 압력으로 행해진 대학 당국의 감원 바람을 일컫는다. 여난이란 기혼자인 임 교수가 일년 남짓 관계를 맺어온 같은 학교 여교수 심 선생과의 인연을 말하는데, 국난과 교난 사이에 여난이 끼어 있다는 게 이 소설을 읽는 일차적 흥미로움이다.
“가외의 그런 여자가 생김으로써 공연히 들떠 돌아가는 사내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만이 알 텐데, 그런 우쭐거림도 한창 나이가 저지르는 짓거리임은 곧장 알아지는 돈오라 할 수 있다. 내일 당장 연구실에서 쫓겨나는 한이 있더라도 매일 저녁마다 다담상을 받고 싶은 마음을 물리치기는 좀체로 어려웠다.”(189쪽)
임 교수는 스스로 “공갈의 시대이자 주먹 앞에 꼼짝도 못하는 세월”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그 살얼음판 같은 시대에도 감쪽같이 성적 일탈을 즐기는 자신의 낭만을 두고 ‘엄연한 사생활의 영역’이라고 치부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엄연한 사생활의 핵심으로 누구로부터도, 심지어는 부모형제나 아내로부터의 간섭, 제재, 처벌 일체까지와 맞붙어 싸우며 물리칠 권리가 내게는 있었다. 심 선생을 좋아한다든지 사랑한다든지를 떠나서, 나로서는 미처 그것까지 생각해보지도 않았고 제3자들이 알 것도 없을뿐더러 물어볼 이유나 권리도 없을 텐데, 내 사생활은 내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자위권이었다.”(185쪽)
‘사생활’ 운운하는 임 교수의 자기 방어적 진술은 개인의 자기 결정과 자기 보존의 권리가 언제라도 위협받을 수 있는 시대라면 그 밖의 다른 이야기는 공론(空論)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자기 희화의 맥락인 것이다. 이러한 자기희화의 이면에는,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했던 그 시대성에 대한 착잡한 긍정이 개입되어 있다. 지방 도시 한복판의 마당 넓은 이층집에서 시작된 해프닝 같은 심 선생과의 혼외정사야말로 ‘돌풍 전후’의 시간에 대한 유일한 대안처럼 보일 정도다. 소설은 이처럼 한 시대의 거대한 심리극과 한 개인의 자기 방어적 심리극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한다.
임 교수가 집안 내력 이야기에서 쏟아놓는 경북 방언의 향연도 놓치기 아깝다. 그 사투리 입말들은 작가가 ‘작가의 말’에 밝혔듯 “작정하고 덤빈 작업”의 결과이다. 함께 수록된 중편 ‘나그네 세상’과 ‘재중동포 석물장사’에서도 맛깔스럽게 복원된 경북 사투리를 만날 수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