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지기 위해 짐을 싸지만…비 핑계로 하루 더 머무는 여자
입력 2011-02-18 23:13
베를린영화제 진출作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내내 태연하던 남자는 양파를 핑계 삼아 욕실에서 운다. 바람을 피운 여자는 뒤늦게 남자의 가슴을 친다. 두 사람은 마침내 헤어졌을까.
이윤기 감독의 신작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별을 앞둔 남녀의 세 시간을 그저 담담하게 따라간 영화다. 뚜렷한 줄거리나 기승전결은 존재하지 않고,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할 사건도 없다. 카메라의 움직임도 소박하기 그지없다. 오프닝을 제외하면 모든 신(scene)은 집 안에서 이루어진다. 중심이 되는 것은 여자와 남자의 심리 변화다.
그러니 현빈과 임수정 두 배우의 역할이 막중했다. 두 사람은 드러날 듯 드러나지 않는 듯하면서 드러나야 하는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재현했다.
차 안에서의 대화로 시작하는 첫 장면. 감독은 이 장면을 롱테이크로 잡아 무려 10여분이나 할애했다. 출장에서 돌아오는 아내(임수정)를 언제쯤 마중 나갈까, 작업실을 아내가 있는 집으로 옮길까, 궁리하던 남자(현빈)가 갑작스럽게 아내로부터 ‘집을 나가겠다’는 말을 듣는다. 아내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고도 한다. 남자는 한번도 ‘왜’ 라던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남자가 누구냐고 묻지도 않는다.
그리고 장면은 바뀌어 집이다. 짐만 싸면 여자가 집을 나가기로 한, 두 사람의 마지막 날이다. 장대같은 비가 내리고 여자와 남자는 비 때문에 혹은 비를 핑계로, 하루를 더 있기로 한다.
헤어지기 위해 짐을 싸는 여자는 곳곳에 묻어 있는 둘의 추억을 발견한다. 5년 동안 함께 한 두 사람의 대화는 내일 헤어질 사람들 같지 않다. 창문 닫기를 힘겨워하는 여자에게 남자는 요령을 자세히 설명해주고, 여자는 가루 세제가 좋지 않다며 액상 세제를 사야겠다고 말한다. 이별은 쉬워 보여도 쉽지 않고, 올 것 같지 않아도 오고 만다.
남자와 여자는 ‘괜찮아지겠지’ 라는 말을 각각 한 번씩 한다. 남자는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영화의 첫 신에서, 여자는 길 잃은 고양이를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 것도 되돌릴 길 없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자조다. 여러 정황과 감정이 응축된 간결한 대사는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 임수정은 이유 없이 다른 남자를 만나고, 끝없이 자상한 남편에게 화를 내고, 새 연인의 전화를 받으면서는 외려 흔들리는 표정이 역력한 ‘그녀’ 역할을 맡아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건이 있고 볼거리가 있고 클라이맥스가 있는 기존 영화의 문법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질 법하다. 그러나 보고 있을 때보다 보고 난 뒤 긴 여운이 남는 작품이니 용기를 내 시도해보시기를. 아시아 영화로는 유일하게 올해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이 감독의 전작 ‘여자,정혜’에서 호연했던 김지수가 카메오로 출연해 눈길을 끈다. 15세가. 다음달 3일 개봉.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