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 한글 완역 출간 100주년 기념 좌담회] 기독교와 한글 만남이 평등·자유 향한 통로가 됐다

입력 2011-02-18 17:40


△김순권 대한성서공회 이사장=한글성경이 한국 문화와 어떻게 공존하며 발전했는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성서의 역사적 배경을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한국은 개신교 최초 선교사인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도착하기 이전에 성경이 번역된 나라였습니다. 1882년 존 로스 목사가 중국 선양(瀋陽)에서 조선인을 만나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번역해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또 1883년 일본에서는 이수정(성경 번역가)을 중심으로 마가복음이 번역됐습니다. 이후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일본을 거쳐 한국으로 올 때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후 1906년 신약성경, 1911년 구약성경이 번역됐습니다.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1911년 한국교회에 큰 획을 그은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구약성서가 완역 출간된 것이고, 또 하나는 서울 종로2가에 성서회관이 건축된 것입니다. 성서회관을 통해 국내에서 성경이 번역, 출판, 반포되는 기반을 마련한 것입니다. 아울러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성서 사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 기독교가 하나의 성서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일제 때도 성경은 한글만 고수

△임성빈 장로회신학대 교수=1910년이 나라의 주권을 잃은 ‘절망의 해’였다면 1911년은 질곡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희망의 씨앗’을 발견한 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 완역본이 탄생했다는 것은 하나님 계시를 전보다 더 많이 소화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에게는 ‘성육화’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할 수 있고, 기독교와 한국문화가 만나는 과정에서 맺힌 첫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1911년은 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 당시 기독교가 나라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이=소설가 이광수는 ‘조선과 기독교’란 책에서 “만약 기독교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한글은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한글은 1466년 세종대왕이 창제했지만 400년이 넘도록 유교 지식인들의 문화에 억눌려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서 66권이 한 권으로 번역 완간된 것은 한글 역사에서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한글 창제 이후 한글로 방대한 문장이 집대성된 책은 성경이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한글을 깨운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한글을 깨워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1943년 이후, 교회 목회자들과 신학교수들은 모두 일본어로 지식과 진리를 설파해야 했으며, 각종 기독교 문서들은 일본어로 출판됐습니다. 성서만이 유일하게 한글을 고수해 출판해 왔습니다.

△김=그렇지요. 일제의 문화 탄압 속에서 성서는 꾸준히 배포되어 한글 창달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서가 완역된 후, 권서(勸書·성경 말씀을 전하거나 성경을 판매하는 사람)들은 문맹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성경을 전했습니다. 또한 유교사상에 의해 집안에만 있는 여성들을 밖으로 나오게 했지요.

△이=성서의 내용과 더불어 그 내용을 담은 한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평등과 자유 등의 개념을 깨닫게 하면서 자아의식을 성장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성서에서 배운 평등사회 실현, 즉 억압에서 자유를 구현하는 진리는 성도들에게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연스럽게 저항운동에 참여했습니다.

△김=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 성경이 우리의 언어로 번역되자 그 누구에게라도 진리를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어떤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을까요.

△임=1907년 평양대각성운동이 일어나면서 교인들의 삶에서 구체적인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며 회개한 후 도박을 끊고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말씀이 사회적인 운동으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게 해줬습니다. 결국 말씀이 인습으로부터 자유하게 하고, 소수 지도자의 왜곡으로부터도 자유하게 하며, 책임 있는 삶을 위한 단초를 만들어준 것입니다.

성경, 자유 향한 의지 북돋워

△이=1907년에 발생한 평양대부흥 운동은 사경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봅니다. 사경회의 마지막 순서는 수료증 전달 대신 청중과 인도자가 함께 성경을 암송하는 것이었습니다. 1910년 교회 주보를 보면 ‘이번 사경회엔 요한복음 13장을 외워올 것’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데닝 선교사는 60∼70대 노인들이 성경을 줄줄 외우고, 맹인 백사겸이 사복음서 전체를 외우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암송하는 문화는 처음 성경을 접근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외우다가 깨우침을 얻으면 실천을 하는 방법이지요.

△김=성경이 삶 속에 융화되지 않는다면 삶의 변화는 어려운 것인데, 기독교 문화는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까요.

△이=게일 선교사 보고에 1907년 한 농부가 외우는 재능이 없어서 성구 한 절을 읽으면 그대로 실천하는 방법으로 성경을 다 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교인들이 말씀을 삶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옮길 때에 비로소 힘이 생기는 것이라 봅니다.

△임=지도자에게 건전한 신학이 담보되어야 성경을 성경되게 할 수 있습니다. 신학이 중심을 제대로 잡고 있지 않는다면, 소비 중심의 세속적인 세상 문화에 동화되기 쉽습니다. 이제부터 신학, 목회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진다고 봅니다. 건전한 신학이 성경이 성경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김=개인의 세속적인 목표를 위해 말씀을 끌어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말씀과 멀어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이=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목적에 의해 성경을 해석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쓰인 목적에 의해 내가 움직이는 것이지요.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경을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 담긴 목적에 따라 순종했습니다.

△김=신앙과 다른 삶을 사는 경우엔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 기독교를 생활에 접목시키는 것은 어떤 문제가 있는지요.

△임=본질적이고 복합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기독교 문화를 논할 때 두 가지 해석을 원칙으로 삼습니다. 즉 디모데전서 4장 3∼5절과 로마서 12장 1∼2절을 문화적 변혁의 모티브로 봅니다. 문화를 적대적 이분법적으로 보면 딜레마에 빠지기 쉽습니다.

종교개혁은 작은 실천으로부터

△김=성경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적용하다 보면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성경의 진리와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라 봅니다. 혹여 사회에서 기독교의 필요성, 교회의 필요성, 나아가 하나님의 필요성도 거부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까봐 우려됩니다.

△임=과거 하나님께서는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성서를 통한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번 100주년을 맞아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거품을 걷어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동안 우린 무엇을 자랑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우리가 한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한국교회가 성서와 관련해 갖고 있는 문제를 어거스틴의 ‘문자와 영’이란 논문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영(spirit)은 문자로 표현되지만 세월이 지나면 문자는 영을 가두는 사어가 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영은 자신을 표현하는 낡은 언어를 깨뜨리고 새로운 표현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초대교회 시절, 성서는 영적인 부분을 더 많이 다루었고 그 에너지로 사회와 교회를 변혁시켰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의 문화와 교리, 신학이 영을 가두는 낡은 문자가 되었습니다.

△김=한국교회 최고의 위기가 온 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말씀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서구 2000년의 경험을 우린 120년 동안에 압축해서 빠르게 경험했습니다. 단 한 가지 경험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이겠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전야와도 같습니다. 이 불안정한 시기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교리신학이 아닌 본문(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시끄러우면 개혁이 아닙니다. 조용히 성경을 눈으로 읽고, 몸으로 실천하고, 이런 작은 움직임이 누룩처럼 번져가는 것이 개혁입니다.

△임=종교개혁의 의미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가 본질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때를 주십니다. 말씀이 성품을 만들고,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면 삶이 꽃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정리=이지현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