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여인들, 그 본모습은 얼마나 아십니까…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
입력 2011-02-17 17:38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정해은/너머북스
임진왜란 때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義妓) 논개는 국내에서 인기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반면 왜장에게 몸을 더럽힌 뒤 꾀를 내어 왜군을 죽인 후 자결한, 임진왜란 2대 의기 중 한 명인 평양 기생 계월향은 다소 생소하다. 계월향은 남한에서와 달리 북한에서는 널리 추앙받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연구원인 정해은 박사는 이 같은 사실에서 역사란 해석의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역사는 과거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한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이지만, 기록할 대상을 선택하고 역사가 대중의 호응을 얻는 과정은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이런 이유 때문에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기보다는 사건의 배경을 해석하는 데 관심이 많다.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는 정 박사가 조선 여성 25명의 인생을 통해 조선시대를 재해석한 책이다. 기존 역사서가 조선 최고의 색녀 어우동을 다룰 때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초점을 뒀다면, 저자는 어우동이 교수형에 처해 질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에 주목한다.
어우동은 효령대군의 손자인 태강수 이동을 남편으로 둔 15세기 중반 양반집 부녀자였다. 어느 날 은그릇을 만들러 온 은장이가 맘에 든 어우동은 그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남편에게 걸려 친정집으로 쫓겨난다. 이후 몸종의 도움을 받아 기녀로 위장한 그는 관료 생원 서리 등을 가리지 않고 온갖 남자를 섭렵하다가 풍기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어우동을 욕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색녀로 치부하지만 사실 어우동이 쫓겨난 것은 남편이 기생에게 빠져 그녀를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져 어우동의 남편도 관직을 박탈당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왜 남편은 몇 개월 간 관리임명장을 빼앗긴 것에 그치고, 어우동은 극형인 교수형에 처해졌는가.
저자는 어우동 사건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성을 통제해 조선을 성리학 사회로 이끄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해석한다. 여성들이 국가가 요구하는 길에서 벗어날 때 어떤 처벌을 받는지의 본보기로 어우동이 희생됐다는 것이다.
조선 사회가 그녀를 죄인으로 규정했지만, 실상 어우동은 사회적 지위와 규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행동한 주체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다. 자식과 부인에게는 정절의 의무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은 기녀에게 성적 욕구를 해소해 온 조선 남성의 모순적 태도를 어우동이 통쾌하게 비웃었다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폐쇄적인 이미지에 갇혀있던 조선의 여성들은 저자의 새로운 해석을 통해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인물로 거듭 태어난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미암 유희춘(1513∼1577)의 부인 송덕봉(1521∼1578)은 요즘 신세대 여성 못지않은 당당함을 갖고 있었다. 유희춘은 도서를 관장하는 홍문관의 부제학으로 당대 유명 학자였다. 송덕봉은 남편과 세상을 논하고 편지를 교류할 정도로 빼어난 글 실력을 갖고 있었다. 기존 관념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는 남편과 대등한 위치에서 시를 짓고 평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여성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을 법하다. 그러나 ‘미암일기’에 실린 이 부부의 생활은 놀랍다. 문헌에는 “지난밤 부인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내가 조금 실수를 하여 부인이 화를 냈다. 내가 사과하여 곧 풀렸다”고 적혀있다. 송덕봉은 남편의 실수에 ‘버럭’ 화를 낼 정도로 남편을 압도한 부인이었다.
그 외에도 남편이 아내의 월경을 끊긴 것을 알고 걱정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남편이 아내와 격의 없이 터놓고 소통했음을 보여준다. 홀로 한양에서 관직생활을 하면서 여자를 수개월 간 가까이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남편에게 송덕봉은 “나는 옛날 당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지성으로 장례를 치르는 등 최선을 다했다. 당신이 독숙한 일과 내가 해온 일의 가치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무겁겠느냐”면서 남편을 꾸짖고 “앞으로도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라”고 충고한다.
그 외에도 ‘내 글이 장독이나 덮는 종이가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학문에 애착을 보인 임윤지당, 태교 공부로 가족의 번영과 사랑을 가져온 이사주당 등의 당당한 모습은 조선시대 여성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린다. 역사의 주변부에 존재했던 조선 여성들의 주체적인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선희 기자 su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