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정의 사진] 1.5초
입력 2011-02-17 18:14
집으로 돌아온 지 열흘이 넘었는데, 아직도 가위에 눌리는 밤이 있다. 밤새 여러 장의 사진이 합성된 채 사진 속 사건에 함께 휩쓸리다 잠에서 깬다. 세계보도사진상이라 불리는 월드프레스포토 심사를 마치고 겪는 후유증이다.
비영리기구인 월드프레스포토재단은 포토저널리즘 발전과 정보 공유를 목표로 195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생겨났다. 네덜란드 사진가를 대상으로 자그마하게 시작된 월드프레스포토상은 이제 뉴스와 다큐멘터리를 다루는 세계 사진가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신뢰도 높은 상이 됐다. 매체에 실리지 않았어도, 전문가가 찍은 사진이라면 응모할 수 있게 한 열린 사고도 성장에 한몫을 했다.
덕분에 올해 사진상에는 5791명이 10만8059장을 응모했다. 빠르고 편리해진 디지털 덕분에 응모작 수가 급속도로 늘던 지난 몇 년에 비하면 그나마 조금밖에 늘지 않은 숫자다. 최종적으로 수상한 작가는 56명, 수상작은 350점 안팎이다. 전문가들의 사진을 놓고 1% 정도만 가려내는 일은 심사위원에게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공정성과 효율성을 위해 2개조로 나뉜 심사위원단이 투입된다. 일단 1차 심사위원단이 전체 응모작에서 우수작을 선별한다. 일종의 예심인데, 응모작이 많아 평균 1.5초에 한 장씩 사진을 본다. 꼬박 5일간 3000장 보고, 15분 쉬는 일을 반복한다. 이 과정에서 20% 정도만 추려진다. 그러면 2차 심사위원단이 심사를 시작해 최종 수상작까지 결정한다. 이때부터는 신속함보다 신중함이다. 후보작이 좁혀질수록 밤샘 논쟁도 마다하지 않을 만큼 심각해진다.
이 열띤 과정을 거쳐 올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사진가 조디 비버의 초상사진이 대상인 ‘올해의 사진상’에 뽑혔다. 조디 비버의 사진 속 주인공은 아프가니스탄 여성. 지난해 남편의 폭력을 피해 친정으로 도망쳤다가, 이슬람 율법을 어겼다는 죄로 남편과 탈레반에 의해 두 귀와 코가 잘렸다. 그 뒤 버려진 채로 있던 그녀는 구호단체와 미군의 도움을 받아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당시 겨우 18세이던 그녀의 이야기는 미국 주간지 ‘타임’ 표지 기사로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었다. 심사위원들은 이 사진이 여성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인권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높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더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사진가가 사진 속 주인공을 보여주는 태도였다. 비참하고 불쌍한 피해자로 보여주기보다, 그녀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인간의 존엄성을 최대한 살려냈다는 점이 많은 공감대를 형성했다.
물론, 이 사진을 실은 ‘타임’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표지 글과 함께 전형적인 미국 보수언론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작가의 의도는 아니었을 터이다. 같은 사진이라도 설명에 따라 입맛대로 해석되는 게 포토저널리즘 사진의 커다란 특징이다. 조디 비버의 대상을 바라보는 진정성이 더욱 빛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1.5초 동안 시선이 멈추었던 10만장 후보작 중에서 이 사진이 대상이 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짧은 순간 시선을 잡아내는 이미지의 힘에 새삼 경이로워진다. 하긴 사진가가 이 사진을 얻기 위해 셔터를 누른 시간은 0.5초도 되지 않는다. 운명 같은 사건은 생각보다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송수정<사진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