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6)] “市가 직접 하면되지…” 조직위 구성에 신경전

입력 2011-02-17 18:09


가까스로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가 꾸려졌지만 과제는 산적해 있었습니다. 조직위를 ‘출범’시키는 것 자체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영화제 하는데 부산시가 직접 하면 되지 사단법인이 왜 필요한가’라는 문정수 부산시장의 반대가 있었다고 오세민 부시장이 전하더군요. 결국 창립총회는 문정수 시장이 주재했습니다.

저는 총회에서 일단 정관이 통과된 다음, 2명으로 돼 있던 부집행위원장을 3명으로 수정하자고 긴급 제의했습니다. 부산시 정무부시장을 부위원장에 앉혀야 앞으로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 같았거든요. 오거돈 부산시 내무국장은 부시장을 집행위원장 아래에, 그것도 다른 부위원장들과 동격으로 임명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는다며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저는 ‘시가 직접 추진하면 되지…’라는 시장 의견을 전해들은 직후였기에 ‘시가 직접 관여하려면 부시장이 부위원장을 맡아야 한다’는 논리로 시장의 동의를 구해 통과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정수 시장이 조직위원장, 강병중 상공회의소 회장이 부조직위원장, 시 교육감과 시 의회 문화환경위원장, 언론사 사장, 예총 회장과 부산영화인협회장 등이 조직위원인 사단법인 부산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조직위 밑에 집행위원회를 두어 제가 집행위원장을, 주윤탁 경성대 교수와 박광수 감독 그리고 오세민 부시장이 부집행위원장을 맡았습니다. 조직위에 서울의 영화계 단체장을 제외한 것은 광주국제영화제를 ‘반면교사’로 삼은 결과였습니다. 광주국제영화제는 부산보다 먼저 출범했지만 조직위의 구조적 결함 때문에 지지부진했기 때문입니다.

실질적으로 영화제를 이끌 사람들을 뽑는 일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프로그래머는 창설을 주도한 이용관 교수(한국영화), 김지석 교수(아시아영화)와 전양준 평론가(비 아시아권 영화)가, 사무국장은 오석근 감독이 맡았습니다. 준비 단계부터 자문해준 영국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위촉했습니다. 6년간 홍콩영화제 프로그래머로 활약하다 중국 정부의 압력으로 그해 3월 홍콩영화제 폐막 직후 해임된 웡 아인 링도 즉시 프로그램 어드바이저로 영입했습니다. 남의 불행이 우리의 행운이었던 셈이죠.

스위스 바젤에 거주하는 임안자 여사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재미교포 임현옥, 그리고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동신을 프로그램 컨설턴트로 위촉해 미국과 유럽에서 영화 선정 작업을 돕도록 했습니다.

6월 초 영화제 운영의 자문도 구하고 부산시민의 관심도 끌려고 ‘국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여기서 샌프란시스코 아시아아메리카영화제 집행위원장인 젊은 재미교포 폴 이(Paul Yi)가 주제발표를 했고, 저에게 집요한 설득을 당했습니다. 결국 그는 영화제 창설 과정에 ‘페스티벌 어드바이저’로 참여한 뒤 9월 21일 영화제가 끝난 다음에야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영화제 운영 경험이 많았던 그의 역할은 매우 컸습니다. 특히 ‘티켓 전산화’와 ‘티켓 카탈로그’는 그의 권고에 따라 때마침 전산화 업무를 추진 중이던 부산은행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죠.

이렇게 6월 이전에 영화제 조직 체계가 정비되고 모든 의사결정이 집행위원장, 부위원장, 프로그래머의 회의에서 이뤄졌기에 신속했습니다. 그러나 부산시와 협의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주무, 계장, 과장, 국장을 거쳐야 했고 3월과 4월에 오찬과 만찬을 겸한 부산시장 보고회의가 있었지만 그때그때 시장의 결심을 받는 일은 쉽지 않더군요. 고심 끝에 저는 매주 시장 관사에서 조찬을 함께하자고 건의했습니다.

6월 21일부터 시작된 문정수 시장과의 조찬, 오석근 사무국장과 시의 주무과장이 배석한 이 자리에서 모든 주요 사항이 결정됐습니다. 이렇게 되자 준비작업을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8월 23일까지 계속된 조찬 모임을 통해 문정수 시장은 ‘영화제에 관한 모든 일은 집행위원회에 맡기라’는 지시를 내렸고, 영화제가 ‘부산시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한다’는, 그래서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중대한 정책 결정이 이뤄진 것입니다.

조직위 출범과 함께 프로그래머들은 즉시 영화 선정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창설을 해외에 알리는 일도 시급했습니다. 박광수 부위원장 등 여러 명이 베를린영화제와 홍콩영화제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필립 쉬어 싱가포르영화제 집행위원장에게 부탁해 오석근 사무국장과 김정화를 싱가포르영화제에 파견 근무토록 했습니다. 영화제 운영 실무를 경험토록 한 겁니다.

5월 8일 저는 전양준 프로그래머와 함께 49회 칸영화제에 갔습니다. 88년 몬트리올에서 만났던 피엘 리시앙의 소개로 많은 영화인들을 만났습니다. 5월 11일, 제가 주최한 오찬에 칸영화제 선정위원이던 막스 테시에와 피엘 리시앙, 낭트영화제 알랭 잘라도, 뮌헨영화제 클라우스 에더, 몬트리올영화제 세르즈 로지크, 로테르담영화제 사이먼 필드 집행위원장, 베를린영화제 포럼 책임자 울리히 그레고르 그리고 영화잡지 ‘버라이어티’와 일간지 ‘르 몽드’ 기자 등 15명이 참석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부산에 꼭 오겠다고 약속하면서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축배를 들었습니다. 프랑스 전통 음식점 ‘가브로슈’에서 가진 이 오찬은 저에게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을 예감케 한 중요한 회동이었습니다.

다음날 저는 뮌헨영화제의 클라우스 에더와 따로 만났습니다. 그는 국제영화비평가연맹의 사무총장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만나자마자 그는 부산영화제 개최 기간을 바꾸라고 권유했습니다. 부산영화제의 개·폐막일과 그 시간까지 후쿠오카영화제와 일치한다는 겁니다. 이를 바꾸지 않으면 “모두 후쿠오카로 가지, 누가 신생 영화제를 찾아 부산으로 가겠느냐”고 했습니다. 물론 맞는 지적입니다.

매년 9월 후쿠오카시가 주최하는 ‘아시아 포커스 후쿠오카 영화제’는 공교롭게 저하고도 친하게 지내는 일본의 원로 평론가 사토 타다오 부부가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개막일을 바꿀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극장을 빌려서 영화제를 개최해야 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추석 대목을 피해야 했습니다. 추석 직전에 영화 상영을 끝내거나 추석에 개봉하는 영화가 종영되는 ‘추석 3주 후’에야 극장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해인 96년에는 9월 26일이 추석이었기에 9월 13∼21일로 영화제 기간을 정했던 것이었죠. 저는 영화제가 끝나고 그해 11월, 하와이영화제에서 사토 타다오 부부를 만나 오해를 풀었습니다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