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예측, 정치 색안경을 끼다… 정권 따라 변하는 ‘미래보고서’

입력 2011-02-17 18:08


‘평균 수명은 80세. 정보저장·재생장치 등이 학교뿐 아니라 가정과 직장에서 광범위하게 이용된다. 회의는 텔레비전(화상) 전화로 하고, 주휴 2일제(주 5일 근무제)가 도입된다. 도시마다 종합예술센터를 갖추고, 골프는 대중화된다….’

40년 전 우리 정부가 내놓은 ‘서기 2000년의 한국’ 보고서 일부다. 전화기 한 대가 아파트 한 채 값이던 시절, 공짜 휴대전화 간판이 즐비한 현재를 상상력만으로 그려낸 작업치곤 믿기 힘든 수준이다. 첫 시도답게 장기전망 자체에 충실했던 것이 예측력의 비결이었다.

그러나 이후 등장한 정부 미래보고서는 뭔가 이상하다. 전망보다는 목표에 가까운 예측이 강해졌다. 미래 청사진이 해당 정권의 국정방향과 중장기 국책과제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된다는 비아냥거림도 나온다. 정부 미래보고서가 어쩌다 정치논리에 엮이게 됐을까.

1970년에 바라본 서기 2000년

우리나라 미래연구는 개발도상국 시절 선진국 수준에서 출발했다. 해외파 출신 이한빈 전 경제부총리 등이 주축이 돼 1968년 창설한 한국미래학회의 힘도 컸다.

미래학회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함께 1970년 8월부터 이듬해 2월말까지 ‘서기 2000년의 한국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과학기술처(현 교육과학기술부)의 지원으로 시작된 이 연구에는 7개월간 대학생을 포함해 1060명이 동원됐다. 서울과 지방, 국립과 사립, 대학원과 육군사관학교까지 설문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대학생만 555명이다. 30년 후 한국을 이끌 세대라는 점이 고려됐다. 전국 신문사, 통신사 편집국의 부장급 이상 간부와 논설위원 등 언론인 170명도 설문대상에 포함됐다.

미래예측 기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과거의 통계적 흐름을 미래시점까지 연장하는 추세적 전망과 설문조사에서 다수가 선택한 미래를 실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하는 ‘델파이(Delphi)’ 방식이다.

보고서는 조사방식과 관련, “미래가 결국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신념이 뒷받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반도 대륙붕 석유 시추 가능성 등 스스로도 한계를 인정한 예측도 있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1970년 3140만명인 인구가 2000년 4700만명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은 실제인 4614만명에 거의 근접했다. 서울인구(전망 1200만명, 실제 990만명)와 경제활동인구 비율(전망 45.0%, 실제 48.0%)도 유사했다. 인구구조로는 평균 여든까지 살 네 사람이 한 가정을 이루는 핵가족화 가능성과 함께 저출산·고령화 현상도 제대로 짚었다. 전국 자동차도로가 완전 포장되고, 초고속 대중교통수단의 출현으로 서울과 부산을 2시간 이내에 연결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됐다.

30년 후를 내다본 보고서의 결론은 향후 10년간 과학기술정책에 맞춰졌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0.5%에 불과한 연구개발투자 비중을 1.8%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연구개발투자의 30%는 무조건 기초과학 육성에 투자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정보가 가장 값비싼 상품”이 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내놓은 정책제안도 획기적이다. “전자계산기(현재의 컴퓨터) 도입은 필연적으로 데이터 통신망 형성을 요구하는데 데이터 통신망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보다 전화망을 동시에 이용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현재 전화회선은 증설 일로에 있으므로 신설되는 교환국만이라도 전자교환 방식으로 전환하도록 하고 조속한 시일 내에 전부를 전자교환기로 대체해 급증할 데이터 통신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정권별 미래보고서 어떻게 변모했나

1971년 발표 이후 한동안 뜸했던 정부 미래보고서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92년 문민정부 출현 직전이었다. 1989년 대통령 소속 자문기관으로 설치된 21세기위원회가 주요 역점사업의 정책적 타당성과 효율성을 검토해 장기발전전략 수립 차원에서 내놓은 ‘2020년의 한국과 세계’가 그것이다. 1971년 보고서와 동일하게 30년 후를 내다보는 작업이었다.

이 보고서는 한국사회에 일어날 정보혁명이 일상생활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 것으로 예측했고, 인구가 정체되면서 한국이 선진국 형태의 인구구조를 갖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 미래보고서는 이 보고서를 기점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민간 주도의 미래예측 작업은 정부 주도로 바뀌었다. 김영삼 정부 들어 21세기위원회가 세계화추진위원회를 지원하는 국가정책자문위원회로 바뀌면서 당장의 현안과는 먼 장기정책보다는 중·단기정책으로 초점도 옮겨졌다.

이 같은 변화는 김대중 정부의 ‘비전 2011’로도 이어졌다. 당시 미래기획에 참여했던 한 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가 끝나자 단기 위기극복 대책만 있고, 중기 비전은 없다는 반성에서 시작됐다”며 “10년 이후를 목표로 미래전망 없이 중기 정책과제 설계 위주로 논의했다”고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전망주기가 짧아졌던 미래보고서는 참여정부 들어 ‘비전 2030’으로 다시 장기화됐다. 한국행정연구원 서용석 연구위원은 “참여정부의 미래비전은 성장에 집중하던 이전 정부들과 달리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으로의 전환을 언급한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평가했다. 노인수발보험, 근로장려세제(EITC), 주택바우처 등 새로운 복지프로그램 도입 등 비전 2030이 계획대로 실현되면 국민소득 대비 복지지출 규모가 OECD 최하위 수준에서 2020년 현재의 미국 일본 수준, 2030년에는 현재의 OECD 평균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됐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미래전략기구로서 미래기획위원회를 설치해 ‘미래비전 2040’ 설계에 나섰다. 한 정부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는 처음부터 노무현 정부가 2030을 했으니 우리는 2040을 (전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했다.

‘비전 2030’과 ‘미래비전 2040’

정부의 미래 전망은 5년 단임 대통령제 권력에 취약성을 보였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가 맞지 않는 기존 미래보고서와 전문가들은 과감히 버려졌다.

미래기획위원회 관계자는 “현 정부에서도 ‘미래비전 2040’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다. 지나치게 먼 미래만 담고 있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보완책으로 ‘실전 비전 2025’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는데 솔직히 제대로 되진 않는다”고 말했다.

한 세대 너머를 봐야 할 미래보고서가 정치논리에 엮여 5년마다 휘둘리는 상황이 반복되자 정부 차원의 미래연구기능을 아예 국회 소속으로 둬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앙대 공공행정학부 김동환 교수는 “핀란드의 미래상임위원회는 입법부가 중심이 돼 미래예측과 미래지향적 정책검토를 수행하고 있다”며 “우리 국회도 상임위 설치로 입법평가와 미래예산, 미래부채 심의 기능을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현 정부의 미래비전이 여전히 수치상 성장에 초점을 맞춘 ‘더 큰 대한민국(the Greater Korea)’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행정연구원 서 연구위원은 “물질 중심의 성장 일변도로 흐르다 보니 정부에서 내놓는 미래 비전에 이념과 가치가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일 수 밖에 없다”며 “성장지상주의 미래 비전과 전략은 다양한 가능성의 미래의 구상 실패로 연결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동권 기자 danch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