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고 ‘대일밴드’ 다섯 멤버 희망의 노래… 강원도 산골 말썽쟁이들 ‘드림하이’
입력 2011-02-16 17:43
“서울 대형집회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싶어요.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강원도 평창고 2학년 이일규(18)군의 바람이다. 그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의외다 싶을 것이다. 이군은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위 ‘놀던’ 학생이었다. 틈만 나면 친구들과 PC방, 오락실로 몰려다녔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 지는 이미 좀 됐다. 가끔 지나가는 후배 불러다가 군기 잡고 ‘주머니 검사’도 했다.
그럴 때도 교회는 다녔다. 모태신앙인데다 어머니가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집회도 많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주변 아이들이 다 그랬다. 같이 놀다 보니 PC방으로, 뒷골목으로 다녔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정작 음악이었다. 록음악. 구체적으로 드럼이었다. 그는 중학교 때 교회에서 드럼을 본 후 “이거 재미있겠다” 싶었다. 이후 인터넷을 뒤져 동영상을 보면서 드럼을 배웠다.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발로 교실바닥을 구르면서 연습했다. 수업시간에도 습관처럼 두드리고 구르다가 “너! 뭐하냐”는 핀잔을 들었다. 그는 지금 평창고 록밴드 ‘대일밴드’에서 드럼을 치고 있다.
그에게 음악은 복음 실은 메신저였다. 그는 더 이상 술과 담배에 손대지 않았다. 좀 논다는 아이들이 자주 모이는 뒷골목에는 가지 않았다. 드럼 연습할 시간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이 군은 밴드의 리더로서 팀 5명을 이끌고 있다. 교회에서는 찬양단의 일원으로 활동한다.
달라진 것은 이군만이 아니다. 대일밴드 멤버들은 음악을 통해 질풍노도의 시기를 딛고 비전을 세우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학교생활 뒷전 파출소도 들락날락
지난 14일 이들의 희망 노래를 듣기 위해 서울에서 자동차로 내리 4시간을 달렸다. 도로에는 계속 눈발이 날렸다. 라디오는 눈사태를 맞은 강원도에 또 눈이 내린다는 소식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실사단이 평창에 도착했다는 뉴스를 번갈아 전했다. 대일밴드 연습장소인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감자꽃스튜디오’(대표 이선철)에 다다르자 히트곡 ‘낭만고양이’로 유명한 ‘체리필터’의 ‘내게로 와’가 들려왔다.
앞머리 외에 옆과 뒷머리를 길게 기른 아이 4명이 기타 베이스 드럼 보컬을 맡고 여학생 1명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남학생인데도 귀를 뚫었다. 짝 달라붙는 청바지와 부츠가 눈에 뜨였다. 좋게 보면 뮤지션 같았다. 나쁘게 보면 여전히 튀는 아이들 모습이었다. 하지만 고등학생다운 순수함이 있었다. 음악의 열정만큼은 여느 뮤지션 못지않았다.
대일밴드는 1998년에 만들어졌다. 당시 멤버들은 지금보다 문제가 더 심각했다. 학교생활은 뒷전이었다. 지각은 부지기수였다. 술 먹은 다음날은 학교에 안 갔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골칫거리였다. 파출소도 들락날락했다.
이중 한 친구가 음악을 좋아했다. 몇몇을 부추겨 악기를 사 뚱땅거렸다. 그러자 사고 치는 횟수가 줄었다. 학교는 2002년 교내 정식 동아리로 인정했다. 이렇게 대일밴드가 탄생했다.
밴드 활동하면서 자신감과 신바람
밴드로서 구색을 갖춘 것은 2004년 인근에 감자꽃스튜디오가 생긴 후부터다. 감자꽃스튜디오는 폐교(옛 노산분교)를 활용한 지역주민 ‘교육·문화공간’이다.
이 대표는 유기호 당시 평창고 교장과 친분이 있었다. 유 전 교장은 이 대표에게 대일밴드 실력도 키우고 아이들에게 비전을 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부탁했다. 이 대표는 지인인 인디 뮤지션 김희범씨에게 맡겼다. 낚시하러 평창을 자주 찾던 김씨는 좋다고 했다. 그는 한 달에 2회씩 정식으로 악기 연주와 보컬을 가르쳤다.
뚱땅거리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전문적인 교육이 진행되자 밴드에 임하는 아이들의 자세가 달라졌다. 연주에 더 집중했고 연습도 많이 했다. 자부심도 가졌다. 이 대표는 스튜디오 공간 일부를 상시 연습장소로 제공했다.
그렇게 1년만 지나면 학생들은 몰라보게 변했다. 노형준(18·베이스) 군은 ‘지각쟁이’에다 ‘말대꾸왕’이었다. 밴드 활동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와 사이도 좋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노군은 가족들 앞에서 베이스기타를 연주한다. “아버지가 가끔 쳐 보라고 하세요. 칭찬은 안 하세요. 그래도 웃어주시니 큰 힘이 되죠.”
3남중 막내인 고명재(18·기타) 군은 늘 주뼛거렸다. 하지만 밴드활동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다. 그는 부활의 리더 김태원의 기타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돋는다고 했다. “아직 그렇게 강렬한 사운드를 내지 못하지만 관객이 박수쳐주니 덩달아 신이 난다”고 말했다.
음악은 ‘필살기’ 아닌 즐거움
홍일점 진누리(18·키보드) 양은 초등학교 때 배운 피아노를 갈고 닦기 위해 밴드에 가입했다. 그는 병원을 설립하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서 가난한 이를 치료하는 것이 그의 꿈이다. “지금 배운 연주 실력으로 그 병원에서 콘서트를 열어 환자를 위로하는 것도 좋겠네요”라며 웃었다.
밴드로 구색을 갖춘 후부터 계산해 이들이 7기다. 지금까지 70여명이 대일밴드를 거쳐 갔다. 1기라고 해봐야 24∼25세. 아직 이들의 희망 찾기는 진행형이다. 이들 중에는 경희대 단국대 숙대 등 수도권 대학에 진학해 법학 간호학 사회학을 공부하는 이들도 있다. 이 대표는 “사실 시골 고등학교 학생이 수도권 대학에 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런데도 저마다 목표를 갖고 진학하는 것을 보면 흐뭇하다”고 말했다.
밴드 활동 이후 음악을 전공하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음악은 공부가 아니라 취미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현재까지 서너 명이 실용음악과에 진학했다. 7기 팀에서는 보컬 김정엽(18)이 음악을 전공할 생각이다. “부모님이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라고 하시네요. 요즘 베이스 등 다른 악기를 배우는 중이에요.”
감자꽃스튜디오에서 대일밴드를 지도하는 안병근(24)씨는 1기다. 그 역시 파출소를 들락날락거렸지만 밴드의 리더까지 맡으면서 달라진 경우다. 그는 연주뿐만 아니라 이론 공부까지 해 백석대 실용음악과에 들어갔었다. 지금은 후배에게 악기도 가르쳐주고 지역민을 위한 작은 콘서트도 연다.
대일밴드 “반창고 이름 아닙니다.”
대일밴드의 연주 실력은 교내수준을 넘었다. 무대도 학교를 벗어났다. 지난 10월 평창군 봉평면 무의 예술관에서 주민음악회를 열었다. 작년 말 서울에도 진출했다. 11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전국문화예술교육축제에 참가했다.
‘대일밴드’ 뜻은 뭘까. 혹시 우리가 아는 반창고 이름? ‘大一밴드’로 “크게 하나가 돼라”는 뜻이다. 한때 이름을 바꾸자는 얘기도 있었다고 한다. “사회자가 “다음은 대일밴드의 무대입니다”라고 소개하면 관객들이 쿡쿡거리더라고요. 아예 코믹하게 가든지, 아니면 그럴듯하게 이름을 바꾸자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냥 뒀죠. 뭐. 고민하기 싫어서요.” 안씨의 설명이다.
이제 ‘대일밴드’는 평창군의 명물이 됐다. 지역 주민들은 어느 멤버가 누구 아들인지 다 안다. 부모들은 대일밴드가 고맙기 그지없다.
꿈이 뭐냐고 순서대로 물었다. 한결같은 이야기는 돈을 벌고 싶단다. 돈 벌어서 뭐할 생각이냐고 했더니 가장 먼저 꼽는 것이 부모님께 효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소리로 덧붙이며 웃는다. “그동안 속만 썩여 드린 것 같아서요.”
■ 감자꽃스튜디오
‘감자꽃스튜디오’는 지난 1999년 폐교된 평창초등학교 노산분교를 개조해 만든 교육·문화센터다. 분교를 반투명 외벽으로 둘러싸서 현대미를 살렸다. 1층에는 어린이도서관, 2층에는 멀티미디어 스튜디오와 강당이 있다.
이 지역의 사랑방 같은 곳이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고 교육을 받는다. 그동안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방학캠프로 인근 분교학생 20명에게 타악기 연주, 연극, 영상제작을 가르쳐 왔다. 초등학생 방과후 국악교실, 지역주민 플루트 교실도 있다. 또 폐교를 개조한 인근 교육문화센터 4곳과 네트워크를 만들어 문화예술교육의 노하우를 공유하고 있다.
이외에 전통시장 활성화사업도 벌인다. 2008년부터 주문진시장을 비롯해 옥계장터 춘천낭만시장에서 지역민, 상인, 관광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상인을 위한 스트레칭’ ‘시장 옥상에 마련된 꽁치극장’ ‘할아버지 할머니 무료공연’ ‘시장 갤러리’ ‘음악 퍼포먼스’ 등이다.
평창=글 전병선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