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손 발길 유혹하는 전남 장흥 ‘명물’… ‘정남진 토요시장’
입력 2011-02-16 17:37
“싸게 구경 한번 와 보드라고잉! 후회는 절대 안할팅게”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이청준 소설 ‘눈길’에서 몰락한 집안의 노모가 눈 내린 새벽에 급히 상경하는 자식이 안쓰러워 차부(車部)까지 바래다주고 되돌아오던 날의 심경을 훗날 며느리에게 회상하는 대목이다. 한국문학의 거목인 이청준의 소설에는 유독 억척스런 장흥의 어머니들이 많이 등장한다. 작가의 고향이 장흥인 때문만은 아니다. 산과 들, 갯벌과 바다로 이뤄진 자연환경이 장흥의 어머니들을 억척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남진토요시장에 좌판을 벌여놓은 안양댁도 그런 어머니들 중 하나다.
탐진강 건너 억불산 며느리바위가 봄을 시샘하는 눈보라에 잔뜩 웅크린 이른 아침. 새벽 버스를 타고 눈길을 달려온 일흔의 안양댁이 토요시장 할머니장터에 자리를 잡았다. 소쿠리에는 모진 한파를 이겨내고 파릇파릇 자란 보리순과 냉이가 소복하다. 전날 텃밭에서 캔 푸성귀들이다.
입춘을 지나 우수가 코앞이지만 날씨는 여전히 표독스럽다. 양지 바른 담장 아래에 자리를 잡았지만 무시로 시장통 골목길을 배회하는 눈바람에 뼛속까지 시리다. 언 손을 화톳불에 녹여보지만 그때 뿐. 지나가는 행인에게 “이걸루 된장국 끓여 먹으면 구수하고 맛있어. 싸게 줄팅께 싸가”라고 흥정을 걸어보지만 이른 시간이라 마수걸이가 쉽지 않다.
전남 장흥에는 유난히 이름난 장들이 많다. 장흥읍내의 장흥장과 토요시장, 바닷가 근처에 서는 회진장, 대덕읍의 대덕장이 이들이다. 지리적으로 강진, 영암, 보성에 둘러싸인 중심지인데다 들과 바다에서 나는 물산이 풍부한 때문이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토요시장의 명물은 할머니장터. 시끌벅적한 시장 골목길 양쪽의 난전에는 소쿠리와 보자기에 싸인 보리순, 봄동, 달래, 냉이 등 봄나물은 물론 행여 얼세라 겨우내 갈무리했다 내놓은 밤, 양파, 고구마, 도라지 등이 즐비하다. 텃밭을 통째로 시장으로 옮겨온 모양새다.
할머니장터에 출근하는 40∼50명의 할머니들은 저마다 목에 택호 명찰을 걸고 있다. 관산댁, 안양댁, 서울댁, 여산댁, 황산댁…. 자신의 이름 석 자보다 더 익숙한 택호들이다. 할머니장터는 장흥군이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고 관광객들에게 싸고 믿을만한 농수산물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군에서 하루 교통비 1만원을 지원하며 관리하는 할머니는 160여명. 구수한 남도 사투리에서 묻어나는 넉넉한 마음의 할머니들이 하루 평균 3000여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비결이다.
여느 장터와 마찬가지로 토요시장에는 추억의 국화빵, 호떡, 어묵, 엿을 파는 행상들도 있다. 토요시장의 터줏대감이자 엿장수인 김갑철(80) 할아버지도 그들 중 하나.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엿장수 마음대로 울리는 북소리와 가위소리에 구경꾼들의 어깨도 덩실덩실 화답한다.
토요시장에는 체육관 형태의 상설 수산시장이 따로 있지만 구경하고 흥정하는 재미는 아무래도 무질서해 보이는 난전이 제격이다. 요즘 나오는 해산물은 키조개와 굴로 장흥의 수산물을 대표한다. 끝물인 매생이와 첫물인 감태의 싱싱한 초록색에서 짭조름한 바다냄새를 맛보는 것은 관광객들의 몫.
100여개의 점포로 이루어진 토요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다. 시장 한쪽에는 과실수 묘목이 움틀 날을 기다리고 있고, 뻥뛰기 가게에서는 연신 폭음과 함께 고소한 냄새의 쌀과자가 쏟아져 나온다. 지나가던 구경꾼들이 귀를 막고 얼굴을 찌푸린 채 뻥튀기 순간을 지켜보는 모습은 어릴 적 추억의 장면 그대로다. 대장간, 고무신과 털신을 파는 가게, 그리고 짚신 가게는 토요시장의 감초.
토요시장에서는 한 해에 6800마리 분량의 장흥한우고기가 팔린다. 장흥은 전남 최고의 한우 사육지다. 다행스럽게 구제역도 이곳을 침범하지 못했다. 장날에는 한우고기를 사기 위해 관광버스를 타고 온 외지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사육, 도축, 유통을 일원화해 중간 이윤을 줄인 탓에 시중보다 30%가량 저렴한 탓이다. 근처 음식점에서 상차림 비용만 내면 즉석에서 장흥한우 맛을 볼 수 있다. 한우고기에 키조개와 표고버섯을 곁들인 ‘장흥삼합’은 장흥을 대표하는 별미다.
이밖에도 민속광장 토속음식점에서는 전국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하는 낙지를 비롯해 바지락, 매생이, 촌닭 떡국 등이 입맛을 더한다. 즉석에서 만든 순두부, 무공해 우리밀 분식 등 신선한 농수축산물도 저렴하다. 장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따끈한 국밥과 묵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 기울이는 맛도 그만이다.
토요시장에 흥겨움이 빠질 수 없다. 시장 중앙에 마련된 공연장에서는 연예인 초청공연을 비롯해 품바 공연, 춤 공연, 관광객 노래자랑 등 신명나는 이벤트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촌로와 관광객들이 뒤섞여 흥겨운 노랫가락에 맞춰 어깨춤을 추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잔칫집이다. 굴렁쇠 굴리기, 투호놀이, 고리던지기, 팽이치기, 제기차기는 다양한 체험 이벤트도 구미를 당긴다.
최근 토요시장에 관광명소가 하나 더 늘었다. 주인공은 드라마 ‘대물’의 세트장으로 ‘3대 곰탕집’이란 간판을 내건 허름한 한옥. 드라마에서 하도야 검사(권상우)의 아버지(임현식)가 3대째 운영하는 곰탕집으로 마당에 가마솥을 걸고 뒤뜰에 장독대를 두는 등 1960년대 분위기로 꾸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명흠 장흥군수는 “실제로 이곳에 곰탕을 먹으러 오는 손님도 있다”며 “세트장을 보완해 곰탕을 끓여 관광객들에게 파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억불산 며느리바위가 산그림자 속으로 침잠할 즈음. 장흥의 며느리이자 시어머니인 할머니들이 삼삼오오 머리에 빈 소쿠리를 이고 토요시장을 빠져나간다. ‘눈길’의 노모처럼 이른 새벽 달려왔던 그 길을 긴 그림자와 함께….
장흥=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