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광주광역시 신촌동 강금순 할머니

입력 2011-02-16 18:45


20년째 방방곡곡 장기수·무연고 재소자 찾아 기도

강금순(74) 할머니는 월요일이면 어김없이 새벽 6시에 차 시동을 걸고 전국 각지의 교도소를 향해 출발한다. 광주광역시에서 시작해 대전, 부산, 경북 청송에 이르기까지. 장기수로 희망이 없는 재소자와 외로운 재소자를 찾아 방방곡곡을 다닌 지도 올해로 20년째다. 강 할머니는 교도소 선교단체 사마리아 밀알회의 주축 멤버다. 살기어린 눈으로 쏘아보던 어느 재소자는 이제 삐뚤빼뚤 볼펜으로 꾹 눌러쓴 편지지를 고이 접어 보내온다. 지난 10일 광주 신촌동 강 할머니 자택을 찾아갔다. 호남 명문 수피아여고를 졸업한 신여성 강 할머니의 구술은 억양만 사투리일 뿐 표준어에 가까웠다.

내 고향 칠석마을

테레비에서 고싸움(광주 칠석동에 전승되는 민속놀이) 하는 거 보셨나 몰러. 그 마을이 우리 마을이에요.

그러니까는 촌이죠. 예수 막 믿을 때는 우리 아버님이 아프셨어요. 내가 열 살. 친정아버지가 전도를 받아서 예수를 믿었어요. 그 마을이 미신이 아주 심한 마을이었어요. 지금도 당산 할머니라고 거기 가서 절하고 모시고 그래요. 우리 어머니 고생 많이 하셨죠. 점하고 빌고 굿허고 한 3년을 그러다가 누가 전도하니까 “그래 나 예수 믿을란다.” 살림 다 없앴죠. 그러고는 예수를 믿었어요. 아버님은 병이 낫질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육이오(한국전쟁) 전이었어요. 못 낫고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신앙 지키면서 어려움 많이 당했어요. 집안 어르신들한테 참 핍박 많이 받았어요. “나는 예수 안 믿고는 못 살겠다. 나는 죽어도 예수 믿을란다. 당신들이 내 새끼들 다 책임져 준다면 내 예수를 안 믿지마는 그러지 않고서는 나 사는 거 관여하지 말라.”

아버지 장례 치를 때 난리가 났죠. 믿는 식으로 한다, 안 한다. 어머니가 아주 독실하게 나오시니까 교인들이 와서 장례를 치렀어요. 제사는 우리 아버지 믿기 전에 그때는 엄청 많이 드렸죠. 아버지가 2대 독자고 내 동생이 3대 독자거든요. 제사가 많았어요. 예수 믿은 그 다음날부터는 일절 추도예배라는 것도 없었어. 우리 어머니가 너무 미신에 시달렸기 때문에. “그래 그러셔. 나아 그 귀신들 밥 냄새도 못 맡게 한다.” 제삿날은 밥도 안 해버려요. 밥 냄새도 못 맡게 한다고.

십리길 걸어서 교회 다녀

내가 교회 처음 나갔을 때는 전남 나주에 속해 있는 남평이 10리 거리 되거든요. 거기까지 교회를 다녔죠. 육이오 지나고 대촌면, 면 소재지에 교회가 하나 생기니까 거기로 다녔죠.

교회 전도사님이 내가 졸업할 무렵에 도저히 보낼 형편이 못되는데 수피아여중으로 보내라, 못 보내겠다. 그럼 월사금이 싼 성경학교로 보내라. 처음에는 글루 갔다가 고등학교 때 수피아로 옮겨왔죠. 광주시내에 광주여고 수피아여고 둘 밖에 없었어요. 우리 어머니도 전도사님 말씀 순종하다보니까 보낼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께 논 팔아가면서 그렇게 가르쳤죠.

우리 장로님(남편)은 이북에서 내려온 분이래요. 부모가 없었고 친척만 서울이 있었죠. 6·25 전에 내려왔어요. 군대에 있으면서 독학으로 신학공부도 하고 신학공부 하다가 조선대 법대로 편입해서 공부하고 열심히 사셨어요.

제가 광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인자 어느 전도사님 개척교회를 나갔는데 거기에서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그러면서 전도사님 댁에서 내가 신세를 진 적이 있어요. 그 전도사님이 난중에 통합병원으로 옮겨가셨어요. 그때 국군통합병원, 글로 가셔 가지고 거기에서 군목님을 만나더라고요. 장로님(남편) 그때는 군인이셨고 광주 지방신학을 4학년까지 다녔어요. 4학년 까지 다니다가 중퇴를 하고 조선대를 다녔어요. 3대째 신앙의 가정이고. 중매를 하더라고요. 좋은 사람 실은 많이 나왔는데 내가 수피아여고를 나오니까는. 그래도 대화를 하다 보니까 참 정신이 바로 박였더라고요. 믿음 하나 보고 또 열심히 사는 모습 보고 결혼했습니다.

광주민주화항쟁, 학생회 간부 아들

바로 우리 대전에 있는 아들 대학교 3학년 때. 딸이 대학교 1학년 때네요 잉. 아주 그 때는 육이오 전쟁보다도 훨씬 심하게 여기가 광주 사태를 겪은 거 같아요.

도청 분수대를 둘러싸고 집회를 많이 했었는데, 그 사람들(진압군)이 들어와서 집회하는 사람들 다 해산시키고. 무조건 거리로 나온 사람은 다 쏴 죽였어요. 얼굴만 보이면 공수부대들이 와서 쏴 죽였지요. 민간인 많이 죽었어요.

딸은 대학교 1학년이라 헐 때(시위할 때)는 못 나가버리고. 우리 아들은 긍게(그러니까) 5·18이잖아요? 그때 대학생들이 순례를 나갔어. 수학여행 비슷하게 어디로 갔었냐면 서울로 춘천으로. 친척이 있응게 거기를 들러가지고 늦게 도착했어. 간부라 놔서 엄청 전화가 왔죠. 완전히 하나님이 피신 시켰다고 봐야죠. 굉장히 전화가 많이 왔는데 통화가 안 되죠. 휴대폰이 있을 까 머시 있을까,

진짜 거 사태가 난 바로 그 다음날 와가지고 광주에서 공중전화로 집으로 전활 했더라고. “어머니 광주가 왜 이래요?” 딱 차에서 내려 첫 마디가 그때까지도 교통 차단이 안됐어요. 그 다음날부터 바리케이드 다 치고 보초 서고 그래부러서 버스도 오고가도 못허고. 다른 외지에 있는 사람하고도 통화도 안 될 정도로 아주 난리가 났었죠.

“빨리 집으로 오니라 일체 어디 가지 말고.”

기도 많이 했죠. 무고한 애기들을 막 때리고 죽이고 그러고는 상무관에 시체가 굉장히 즐비하게 차고 병원마다 환자들이 복도 발 디딜 데도 없이. 병원이라고는 3군데. 택시, 버스 기사님들이 분개를 해 가지고 차로 한 번 민 적이 있어요. 차로 공수부대 막 밀고 들어가가지고 그렇게 해가지고 난중에 그 시민들이 무기고를 다 장악을 해 부렀어. 화가 나가지고 그러니께네 그 사람들이 무기를 소지해버리니까 완전히 전쟁판이라. 나중에 도청에서는 호남신학교 학생이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었어요.

메주 쑤려다 만난 하나님

신앙생활은 그럭저럭 하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 만나는 계기가 왔었어요. 그래 가지고 하나님 좀 더 알아봐야겠다. 그래서 신학을 했어요. 목사님이 우리 교회에서 전도사를 해주라 해서 전도사로 한 15년 동안 일을 했어요. 은퇴하고 장로가 된 거죠. 장로 임직은 2000년도 12월. 10년 시무하고 작년 말에 은퇴했어요.

부모님들을 통해서 내가 신앙을 받았고 교회는 내가 열심히 다녔지요. 그러나 내가 열성적으로 또 옛날에 친구 목사님들이 전도사님들이 오셔가지고 같이 손을 잡고 교회를 부흥시켜보자 해도 전혀 뜨뜻미지근해서 거의 호응을 안했었죠.

남편이 군인이라서 안 계시고 내가 집을 짓고 있었는데 목사님이 오셔가지고 나보고 교회 메주를 쑤라고 그러시더라고. 어떻게 그냥 그것도 싫더라고요. ‘목사님 참 속없이 쑤네. 다른 집사님들 다 두고 왜 나보고 이렇게 메주를 쑤라고 하실까.’ 그러고 호응을 안했어요. 집을 짓고 나니까 몸이 안 좋아요. 인자 적십자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까 폐결핵이요. 거기에서 내가 느끼는 것이 있었어요. ‘세상에 네가 뭣을 하다 왔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답을 할까. 자녀들을 낳아서 길렀다고 할까 집을 지어놓고 왔다고 할까. 아주 고민이 되더라고요. 결론적으로는 내가 내 인생을 산 것이 아니다. 그래가지고 아 나도 이제 정말 내 인생을 한 번 살아야겠다.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내가 뭣인가를 내놓을 게 있어야지 않겠느냐고.

‘만약에 이 기회에 하나님 낫게 해주신다면 내가 분명히 하나님 살아계신 걸 알겠습니다.’ 서원 기도라고도 할 수 있겠죠잉. 그런 고백을 했어요. 병이 나았죠. 70년도니까 40년 전이요.

영치금 만원 쪼개 전도하는 재소자

제가 (신학교) 진학 공부를 할 때 어느 계긴가에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드린 것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하나님, 목사님들이 가기를 꺼려하는 곳. 그런 곳에 제발 보내주세요.’ 교도소를 보내시더라고요.

대전 광주 부산, 저기 청송까지 가지요. 교도소마다 몇 사람들 뽑아서 우리랑 결연을 맺었어요. 특별히 장기수들 또 무연고자들 이런 사람들을 골라주세요. 만나서 같이 예배드리고 간단한 다과준비 해 가서 나누고. 선교하는 분들이 한 열 분 정도 계세요. 후원하는 분들이 좀 계시고.

20년 전에 만났던 분들은 거의 출소했어요. 예수 믿고 찬송 부르고. 한 열 군데를 가면서 250명 정도를 만나고 다니거든요. (출소 후) 재범은 별로, 거의가 없어요.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 놓으니까. 청송 같은 데는 너무 사람이 귀하다 보니깐 바깥에 사람 한 번 만나봤음 쓰겠다고 불교인이 왔더라고요. 불교인이 오셨는데 3년 되니까 그 사람이 세례 받더라고요.

우리가 참 재정적으로는 열악하거든요. 보조해주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그걸 가지고 우리가 찾아가는 데 영치금 그때도 만원 지금도 만원 그 정도밖에 못 넣어줘요. 그랬는데 군산에 있는 한 형제는 그 만원을 가지고, 그 만원을 쪼개가지고 전도를 하는 거예요. 같은 재소자한테 편지지도 사주고 볼펜도 사주고 안 믿는 재소자 전도를 하고.

거기 있는 사람 거의 다가 자식은 있더라고요. 전부 고아가 돼 불죠. 할머니한테 자란다거나 고아가 되아 불고. 거기 있으면서 자녀들을 거의 전도를 하죠. 우리가 전도하라 해요. 예수 믿으라 하고 교회 다니라 하고 신앙으로 자라게끔 하라고. 자녀들한테 편지할 때마다.

죽고 사는 문제 아니면

우리 장로님은 66세에 가셨어요. 위암으로 가셨거든요. 그분이 굉장히 먹는 것도 깔끔하고 시간관념 철저하고 아주 그렇게 자기 관리를 잘 하신 분이었어요. 어떻게 그렇게 일찍 가시더라고요.

나는 우리 어머니가 살아계셨고 90세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항상 내가 죽는 나이는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나이에서 25년은 더 살고 갈 거다 그렇게 계산하고 살았는데. 우리 장로님 가니까. 가는 것은 그 거이 아니구나. 어머니가 늦게 가신다고 나도 늦게 가는 거 아니구나.

갈 준비를 나도 서서히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가고. 그런 큰일을 당하고 보니까 어지간한 일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고는 별 것이 아니더라고요. 그렇게 아웅다웅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죽기도 살기도 하는데 부딪히는 거 의견 상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겨지게 내려놓게 하시더라고요. 아하 그렇구나.

그래서 저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그냥 신경을 안 쓰다시피 하고. 당회도 인자 꼭 해야 할 말이고. 이거는 안 되지 싶을 때는 내가 반대표를 던지지 어지건하면 다 따라한다는 방향으로 하고 그랬어요.

12년 전 세상 떠난 남편, 빈 자리

통합측 여성안수가 시작됐었는데 내가 교회에서 은퇴는 했어도 교도소 사역도 하고 그러니깐 인저 (이제) 통합측 교회에서 10년 이상 전도사 한 사람에게는 장신대에서 1년만 공부하게 되면 목사안수를 주게끔 법이 있었어요. 그랬는데 거기서 자꾸 공부를 하라고 공문이 왔었는데 그때 우리 장로님이 아프셨거든요. 그래서 저렇게 아프신 분을 놔두고 내가 또 목사가 되겠다고 공부를 하러 나간다는 건 무의미하더라고요. 포기를 해버렸어요. 목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죠. 계시는 날까지는 뒷바라지 잘해야겠다. 외롭지 않게. 공부하러 다니면 얼마나 외롭겠냐. 가시는 그 봄에 신협에서 은퇴를 하셨어요. 상실감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 그렇게 크진 않았죠. 그러나 한 가지 뭐가 있었냐면. 우리 장로님이 딱 가시고 나니까 내가 교회 사역을 할 때 이런 상실을 당한 사람의 마음은 어루만져주지 못했구나 그게 느껴지더군요.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그건 몰라. 아무리 좋은 말로 위로를 하고 등을 도닥거려 줬어도. 아 내가 이런 마음을 다독이지 못했구나. 동정하는 말로 위로해도 그것도 내게 위로가 안 되고 아무 말도 안고 인사를 하면 그것도 상처가 됐고. 마음이 어떠 되덜(어찌할 바) 못하겠더만요.

장로가 돼서 당회를 딱 들어가 보니까는, 내가 장로님 핀잔도 줬는데 당회를 보고 보니까 회개가 되더라고요. 우리 장로님의 의견이 수렴이 될 수 없었겠구나. 그럴 때는 내가 어루만져 줘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그것도 회개했네요. 장로라는 게 당회를 하게 되면 그렇게 상처를 받게 되는 것인데 내가 그걸 못해준 것이 너무 마음이 아파갖고 회개를 했어요. 그리고 그때 일주일을 잠을 못자고 새벽에 한 3시쯤 나가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기도를 하고···.

인자 특별한 소원은 없고, 그저 건강 허락하는 날까지 사역 계속하는 거 그게 소원이구만요.

연보

1937년 광주광역시 남구 칠석동 3남매 중 장녀로 출생

1959년 23세에 김초현(당시 27세)씨와 혼인

1960년 장남 정국 출생

1961년 장녀 정혜 출생

1964년 차녀 정옥 출생

1982년 호남신학교 입학

1998년 남편 김초현 장로 별세

2000년 장로 장립5남 철기 출생

송정제일교회는

1901년 광주군 송정면(현 광주 광산구 송정동) 신촌리에 배유지(유진벨) 목사와 의사인 오기원(Clement C. Owen) 목사의 전도로 설립됐다. 배 목사가 1대 당회장이다. 가난한 학생을 돕는 남선의숙(1913년), 야학서당(1930년), 유치원(1931) 등을 설립하면서 낙후된 교육 여건을 개선하는 데 기여했다. 일제 치하 국방헌금이란 명목으로 교인들의 헌금을 빼앗아 가던 시절에는 ‘국방헌금을 헌납하지 않은 교인은 교적부에서 제명하라’는 일제의 강압적인 지시를 당회록에 기록함으로써 간접 항거했다. 당시 일제는 부임하는 목회자의 목사직을 잃게 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탄압했다. 우여곡절에도 명맥을 유지하던 교회는 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위원회 소년단광산군지부’ 사무소로 쓰이면서 예배공간으로 사용되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예배를 드리게 된 교회는 54년부터 부흥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31대 당회장인 유갑준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다.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이다. 한편, 강금순 할머니는 2000년 이 지역 교회 최초의 여성 장로가 됐다. 교회는 강금순 할머니의 남편 고(故) 김초현 장로의 공적비를 교회 동산에 세웠다(062-942-4901).

광주(光州)=정리 이경선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 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