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풍경이 있는 창
입력 2011-02-15 17:37
유리창을 공들여 문질렀다. 느릅나무는 마른 잎새를 달랑거리고, 공중에 획을 그은 목련 가지는 묵화를 그려놓은 듯하다. 투명하게 닦인 유리창 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구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창가에 앉은 사람은 외롭지 않다더니 이렇게 풍경을 벗할 수 있어서일까.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한 후로 답답증을 앓았다. 굳게 닫힌 현관문에 단추만한 구멍으로 방문하는 이를 살펴야 했다. 어머니도 아파트는 제비집 같다며 울화증이 일 것 같다고 했다. 그러던 어머니는 부엌 싱크대 위에 눈높이가 맞는 창을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아침잠이 많은 나를 가끔 창으로 불러낸다. 목련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눈을 비비고 달려가면, 목련은 바닷가 물새처럼 하얀 부리를 뾰족이 내밀고 있었다. 그 창에서 어머니는 가방을 메고 돌아오는 손주의 얼굴을 찾아낸다. 하루의 어둠이 내리면 귀가하는 딸의 어깨를 가늠하며 자식의 심경도 헤아린다.
외가의 한지 창에도 손바닥만한 네모배기 유리가 달려있었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 일어나셔서 경대를 꺼내놓고 머리를 정하게 빗으며 매만졌다. 잠든 손주들의 이불을 목 밑까지 덮어주고는 옷고름 끝으로 뿌연 창을 몇 번이고 닦았다. 그리고는 창구멍을 통해 동이 터오는 걸 지킨다. 대문이 삐걱대거나, 누렁이가 킁킁거리면 창에 눈을 대고 밖을 살폈다. 마당에 참새가 내려앉으면 한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당신들은 살아온 시대가 다르고, 내다보던 창의 위치도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저녁별이 떠도 그 유리문에 잠금쇠를 걸지 않았다. 불을 훤히 밝혔다. 말도 별로 없었다. 가느스름한 눈으로 머릿결을 자주 쓸어 올렸던 것 같다. 격랑처럼 흘러간 지난날을 창가에서 되짚어 본걸까. 지난한 시대를 살아오면서 창을 내다보며 슬픔을 여과시키고 정화시키며 살아있는 시간을 견뎌온 건 아니었을까.
창가에서 서너 걸음 물러서본다. 창 밖의 목련은 꽃눈을 부풀리고 있었다. 나무들은 겨우내 언 눈에 발목을 묻고 뿌리로만 겨울을 인내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목련은 꽃눈의 비늘을 두텁게 에워싸며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어깨만 움츠리고 있어 꽃눈을 키우는 목련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사는 데 급급해 창 하나 내지 못한 폐쇄성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젊은 시절, 수많은 창을 욕심껏 냈던 것 같다. 능력도 없으면서 가고 싶은 길도 많았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은, 그 길을 가는 사람들과 만나 밤새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있다고, 자식을 핑계로 그 많던 창을 걸어 잠근 채 한 번도 닦아보지 못하고 세월만 보낸 것 같다.
이제 후여후여 달려온 시간들. 겹겹이 닫아 놓았던 내 의식에 창 몇 개 내고 싶다. 그물막같이 얽힌 세상사지만 사람들을 너그럽게 관조할만한 창, 지금까지 달려온 인생의 1막을 바탕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2막의 창. 그래서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어’라고 중얼거릴 수 있었으면 한다. 창 밖으로 잎새 하나 내려앉는다. 현미경도 없이 겨울이 확대되어 왔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