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판 녹인 ‘사이먼 조’ 아메리칸 드림… 한때 불법체류자 조성문 쇼트트랙 500m 금메달

입력 2011-02-14 21:44

5살 소년은 1996년 어머니 손에 이끌려 캐나다 밴쿠버를 통해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때는 모든 것이 즐거웠다. 그러나 소년은 몰랐다.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1993년부터 미국에서 혼자 지내던 아버지와 함께 살기 위해서였다.

5년 후 소년은 마침내 불법 체류자라는 불명예 꼬리표를 뗄 수 있었다. 2001년 영주권을 받았고 2004년엔 시민권을 취득했다. 하지만 부모가 미국에서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못하는 바람에 소년은 수도·전기가 끊길 정도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언제나 일을 했던 아버지, 어머니와 떨어져 있어야 했던 소년은 얼음 위에서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스케이트가 너무 좋았다. 빙상 위를 빠르게 달리면 달릴수록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고난이 순식간에 스쳐지나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쇼트트랙 세계 챔피언이 되려는 꿈을 꿨지만 4만 달러에 이르는 훈련비를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소년의 부모는 아들 훈련비, 대회 참가비를 대기위해 자신들이 운영하던 가게를 팔기도 했다. 부모의 헌신적인 지원 덕에 소년은 15살의 나이에 미국 쇼트트랙 대표팀 사상 최연소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주니어 시절부터 미국 내 최강자로 군림해 왔던 만큼 곧바로 에이스로서 탄탄대로를 달릴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2008년 대표선발전에서 탈락하면서 다시 고난을 맞았다.

대표 선수 자격을 잃으면서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의 지원금도 끊겼고,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겹쳐 아버지의 사업까지 기울어 잠시 스케이트를 그만두기도 했다.

그러나 재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국의 쇼트트랙 영웅 아폴로 안톤 오노와 장권옥 코치 등 한국인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일어났고, 마침내 2009년 9월 미국 국가대표로 재발탁됐다.

그리고 20살 청년으로 자란 그는 14일(한국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5차 대회 남자 500m에서 42초157로 1위로 골인하는 감격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꿈에도 그리던 월드컵 금메달을 처음으로 목에 건 것이다. ‘기회의 땅’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이민자의 아들이 갖은 역경을 딛고 마침내 ‘아메리칸 드림’을 일구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주인공이 바로 15년 전 불법체류자로 미국 땅을 밟았던 한국계 미국인 사이먼 조(20·사진)다. 한국이름은 조성문이다. 조성문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 이후 미국 사회가 이민자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며 이민 개혁 움직임에 힘을 보태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준동 기자 jd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