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남형두] 젊은 예술가의 초상
입력 2011-02-14 17:55
“저작권 존중하고 문화완성보증제도 살려 유망한 신진작가의 앞길 터줘야”
서머싯 몸은 ‘달과 6펜스’에서 ‘달’로 상징되는 광기 어린 예술세계와 ‘6펜스’로 상징되는 세속적인 삶의 갈등을 그렸다. 런던의 주식중개인이 예술을 위해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파리를 거쳐 타이티 섬으로 이주한다. 강렬한 그림을 그리다 최후를 맞는 소설에서 달과 6펜스, 예술과 세속적인 삶의 평온함은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을 빚는다.
최근 촉망받는 젊은 작가의 죽음을 둘러싼 안타까움 속에 논란이 있다. 그녀가 남겼다는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있느냐’는 마지막 글 때문이다. 고인의 경우 극도의 빈곤은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영화계의 구조적 모순 때문이라는 데서 소설과 다르지만, 부조리한 영화산업 구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정부도 젊은 창작자 보호를 위한 정책 수립에 나섰다. 그런데 있는 제도도 활용하지 않으면서 변죽만 울리는 것 같아 마뜩찮다.
간혹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발굴한 에피소드가 버젓이 유명 작가 작품의 한 대목으로 나오는 것을 본다고 한다. 더러는 소송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일부러 베낀 것이 아니라 우연히 같은 것이라면 저작권 침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특이한 에피소드가 동일하게 나타난다면 보고 베낀 것으로 강하게 추정된다. 드라마나 영화, 연극에서 이런 일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신인 작가들은 자신을 알리기 위해 방송사 또는 유력 제작사 PD에게 대본을 보내는 경우가 있다. 이들 대부분은 휴지통에 버려지는데 그중 쓸 만한 것은 간혹 PD들의 손을 거쳐 유명 작가에게 건네지고 이 과정에서 표절 시비가 발생한다.
지금도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반지하 셋방에서 노트북을 두들기고 수없이 원고지를 찢어가며 새로운 글을 만들어내거나 글감을 찾아 도시를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때로는 거친 글이 유명 작가들의 손에 들어가면 마치 동대문시장의 원단이 잘 재단되어 명품 백화점에 걸리는 것과 같게 된다.
일본에는 에피소드나 시놉시스만을 창작하는 작가들이 있으며 이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문화가 정착되어 있다고 한다. 한 달 수입이 100만원에 미달하는 신인 작가들이 ‘우리도 좀 먹고살자’고 외칠 때 방송사와 제작사의 양심에만 맡길 수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법적 구제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할 일은 돈이 없어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법률구조 사업이다. 돈 몇 푼 쥐어주는 지원 사업보다 저작권을 존중해 주는 제도 정착과 법률 지원이 훨씬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대책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지원은 문화완성 보증제도다. 기술보증기금이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심사해 보증서를 발급하고 그 보증서에 터 잡아 금융기관이 대출을 해 주는 것처럼 담보가 없는 창작자들이 제출한 프로젝트의 우수성을 심사해 보증서를 발급해 주고 금융기관은 이를 담보로 창작자들에게 대출을 해주는 제도다. 이 제도는 본격 시행된 지 2년이 지났지만 정부의 홍보와 달리 지금까지 실적은 200억원 정도로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나마 이 제도의 대표적인 실적으로 홍보되는 드라마 ‘아테나’에 대한 30억원 대출이 말해 주듯 보증사와 금융기관의 관심은 큰 프로젝트에 집중되어 있다. 제도 취지에 맞게 결손이 나더라도 다수의 창작자들이 혜택을 입는 쪽으로 방향이 수정돼야 한다.
심하게 말하면 이 제도의 취지는 떼일 가능성이 있어도 좋으니 다른 곳에서는 돈을 빌릴 수 없는 유망한 창작자들에게 돈을 꿔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데서 돈을 빌릴 수 있고 회수책도 거의 확실시되는 큰 규모의 프로젝트만을 좇는다면 이는 마치 신용 있는 사람만을 찾는 미소금융의 전철을 밟는 것과 같다.
한 끼니 식사를 걱정해야 하는 젊은 예술가의 초상 앞에 문화산업이 경제 성장의 새로운 엔진이라는 말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공허하다. 이들에 대한 적극적 저작권 보호와 손실을 감수하는 문화완성 보증 제도의 적극적 시행을 통해 이런 불행한 일이 재발되지 않았으면 한다.
남형두(연세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