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서정의 문턱, 섬세한 눈길로 넘다… ‘그늘이라는 말’
입력 2011-02-11 17:21
그늘이라는 말/허형만/시안
우리 시단의 세 흐름인 서정, 실험, 참여 가운데 서정의 적자로 꼽히는 허형만(65·사진) 시인이 열세 번째 시집 ‘그늘이라는 말’(시안)을 냈다. 예컨대 ‘시는 가장 많이 금지된 서정의 열매’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게 이번 시집이다. 그만큼 서정의 문턱은 높고 외롭고 쓸쓸하다는 말이다.
지난해 안식년을 맞아 아흔 두 살 어머니가 거처하는 지리산 자락을 자주 찾았다는 그가 지난 구정 때 상경해 전화를 걸어왔다. “둘째아들이 MBC에 아나운서로 있어요. 아내는 아들 뒷바라지하느라 서울에 살고 있고 나는 설 쇠러 서울로 역귀성을 했지요.”
시인은 이어 “언젠가 두꺼운 유리문에 손가락이 끼어 손톱이 깨진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검지와 중지 손톱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는 순간, 짜릿한 아픔을 느끼기 전에 정신이 맑아지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는 것이다. “긴장과 소름, 통증과 눈물을 속으로 감추는 일이/한 세상 살아가면서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토해내는 피로 일갈하고 있는 손톱/시인으로 사는 일이 이럴 것이다”(‘손톱’ 부분)
40년 가까운 시력이지만 그는 문틈에 손가락이 끼어 손톱이 깨졌을 때조차 시를 생각하는 시인인 것이다. 서정의 간단없는 심화는 이번 시집의 미덕이다. “화욕(火浴)이다//태워 없앤다는 거/그리하여 이렇게/맑은 산빛으로 하루 종일 잠들고 싶을 때 있었지//입망(立亡)이다//서서 죽는다는 것/그리하여 이렇게/한 생의 빙벽으로 두 눈 부릅뜨고 싶을 때 있었지/참 깊다 저 눈보라여 불보라여”(‘폭설2’ 전문)
이렇듯 말수를 줄이는 대신 내용의 명징함을 부각시켜온 게 서정의 심화가 아니고 무엇이랴. 목포대 국문과 교수인 그는 “아버지가 호적을 1년 늦게 올려 정년이 1년 늘어난 것이 아버지가 주신 유일한 유산”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를 ‘목포의 마지막 선비’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작고 미세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섬세한 눈길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지난 추석 때 다문화 가정을 위해 수녀님이 빚은 송편을 보고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과 인도 아요디아국 왕족인 허왕옥이 일군 다문화 가정을 떠올리는 시편에서는 자연스레 미소를 머금게 된다.
“이 송편은 분명 나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눈치다/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께서 인도 아요디아국 왕족인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하신/말하자면 이 나라 최초의 다문화가정을 꾸리신/그 핏줄이 나인 줄을 다 안다는 듯/솔잎 냄새 참깨 냄새 자르르 풍기며 입맛 돋군다”(‘송편’ 부분)
그런가하면 제자 가운데 김형만이라는 학생을 부를 때 이름이 같아 성을 떼고 이름만 부르다, 데모를 하느라 출석을 하지 않은 걸 알고 자신이 ‘예’라고 대답한 일화와 ‘식객’의 저자와 이름이 비슷해 생긴 일화를 풀어낸 ‘이름 석 자’에서는 시인 특유의 재치가 돋보인다. 허형만 시인은 이 시집으로 제43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했다. 시상식은 다음달 19일 오후 3시 ‘문학의 집, 서울’에서 열린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