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光化門’ 글씨를 그냥 놔두라

입력 2011-02-10 14:51


문화재청장 인사 배경이 분명치 않지만 광화문 현판의 균열을 둘러싼 논란이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광화문의 특별한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광식 청장의 부임 이전에 문화재청은 ‘현판제작위원회’ 외에 글씨를 다루는 기구를 별도로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주무관청이 원칙을 접고 여론에 상당히 밀린 모습이다.

그래서 걱정이다. 광화문 현판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한쪽으로 몰아가는 세력 때문이다. 이들은 현판 글씨를 그대로 두자는 쪽을 고루하다고 나무라면서 애국심의 이름으로 공명을 챙기려 한다. 그러나 사리가 그렇지 않다. 현판의 나무야 당연히 바꾸되, 글씨는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하다.

먼저 궁궐은 단순한 건조물이 아니라 당대 철학의 산물이다. 광화문 역시 경복궁의 부속물이며, 독립적인 건물이 아니라 200여개에 이르는 문 가운데 하나다. 다만 정문으로서 특별한 대접을 받을 뿐이다. 광화문의 역사성은 여기가 처음이자 끝이다. 광화문이 새로 지어진 건물이므로 새 글씨를 달자는 주장은 복원과 신축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다. 현판을 한글로 달자는 주장 역시 ‘갓 쓰고 구두 신자’는 격이다.

권력의 공명심에 희생될 위기

지금의 글씨가 조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은 어떤가. 나 역시 명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인 글씨를 모양을 들어 바꾼다는 것이야말로 몰(沒)역사적이다. 지금 ‘光化門’ 글씨는 경복궁 건설을 책임진 훈련대장 임태영의 것이다. ‘경복궁 영건일기’에 그렇게 나와 있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글씨의 주인을 찾지 못하는 데 비하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당시의 전통도 존중해야 한다. 문무 구별의 원칙이 있었다. 기록을 보면 내궐의 휘호는 모두 문신이 썼다. 근정전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이흥민, 사정전은 이조판서 조석우가 썼다. 이에 비해 궁궐의 대문은 무관의 몫이었다. 동쪽 건춘문은 훈련대장을 지낸 이경하, 서쪽 영추문은 판의금부사 허계, 북쪽 신무문은 어영대장을 지낸 이현직의 글씨다. 굳이 무관들의 작품을 건 것은 방호(防護)의 의미로 판단된다. 그런데 여기서 광화문만 떼내자고? 글씨의 역사성이 조형성보다 엄중하다.

임태영 글씨가 유리원판에 새겨진 것을 복원했기에 정통성이 약하다는 주장도 딱하다. 디지털 시대에 원본과 복제본 구분 자체가 부질없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아우라가 추사나 석봉의 글씨를 집자하면 생긴다는 것인지. 교태전 글씨도 1994년에 이전 사진을 보고 되살린 전력이 있고, 창덕궁 주합루가 영조 글씨라고 해서 특별하지도 않다. 궁궐 현판은 서예백일장과 다르다.

우리시대의 글씨가 아니어서 서운하다면 경복궁을 한 바퀴 돌기 바란다. 현대 서예가의 작품이 즐비하다. 정도준, 김응현, 양진니, 김훈곤, 조용민, 임창순, 조수호…. 기록에 없는 현판은 모두 요즘 서예가의 손을 빌렸다. 우리 궁궐에 한자를 쓰는 것이 창피하다면 더욱 전진하라. 건청궁 권역의 초양문은 청나라 옹방강, 집옥재는 미불, 협길당은 동기창의 글씨를 따왔다.

새 문화재청장이 중심 잡아야

사정이 이런데도 광화문 현판에 집착하는 이유는 뭘까. 수도의 중심이라는 상징성 때문이다. 그러니 권력이 늘 침을 흘린다. 이승만은 총독부를 중앙청으로 썼고, 박정희는 광화문을 시멘트로 복원해 본인 글씨를 걸었으며, 김영삼은 총독부를 폭파했고, 노무현은 박정희 글씨를 내렸다. 지금 다시 광화문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권력, 언론권력, 시민권력도 가세했다.

여기서 가슴에 와닿는 것이 한 서예가의 자술이다. 어른 키(175cm)보다 큰 글씨 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현대인이 왕조시대의 조형성을 재현하기도 어렵다. 임태영은 명필이 아니어도 경복궁 중건의 책임자로 혼신을 다해 붓을 잡았을 것이다. 숙연하지 않은가. 새 문화재청장은 지금 것을 그대로 두면서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옳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