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의 씨네마 부산-PIFF 15년의 기록 (5)] 영화제 창설에 올인… “패가망신” 주변서 만류

입력 2011-02-10 17:54


1995년 8월 18일. ‘프라자 회동’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작업에 동참하기로 약속한 직후, 저는 9월부터 뜻밖에 대학 강의와 케이블방송 사장을 맡게 되면서 갑자기 바빠지게 되었습니다. ‘백수’였던 제가 졸지에 1인 3역을 맡게 된 거죠.

9월 1일부터는 전남 나주에 있는 동신대학교에 객원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공직에 있을 때도 틈틈이 강의는 맡았기에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제게 주어진 강의가 ‘영화개론’과 ‘세계영화사’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법학과 행정을 전공한 저에게 영화개론은 당치도 않은 과목이었죠.

동신대학교의 강의를 맡게 된 배경에는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과 임권택 감독’의 인연 때문이었습니다. 94년에 개설된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고위정책과정에 태흥영화사의 ’드림 팀’인 이태원, 임권택, 정일성, 강수연이 제1기로 입학했었습니다. 공연윤리위원장이었던 저는 ‘첨단 영상매체와 한국의 영상산업’이란 주제로 제1기부터 제4기까지 특강을 맡았었습니다. 제 강의를 들은 임권택 감독은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때마침 임권택 감독의 고향인 장성군에서는 영화 ‘서편제’를 촬영했던 금곡마을을 ‘영화촌’으로 조성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 중에 있었습니다. 저는 임 감독의 추천으로 94년 11월 10일, 장성군청에서 공무원과 주민들에게 ‘영화촌’ 조성에 관한 공개강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강연이 인연이 되어 그 프로젝트의 연구용역을 맡았던 동신대학교 교수진에 의해 객원교수로 초빙된 것이죠.

‘한국영화정책과 법제’로 석사학위는 갖고 있었지만, 영화에 대한 학문적 기초나 외국 영화사에 대한 지식은 ‘백지’였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영화와 영화사’에 관한 책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탐독했습니다. ‘버라이어티’와 ‘sight and sound’ 등 외국 잡지를 정기 구독했고, 영국 국립영화원(BFI)에서 만든 ‘세계영화사’에 관한 비디오를 긴급 입수해 강의에 활용했습니다. 공부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친 셈입니다.

또 하나의 새로운 직업은 케이블방송의 ‘CEO’였습니다. 95년 9월 18일, 저는 영어전문 케이블방송인 ‘마이 티브이’ 방송국에서 사주인 민선식 사장과 함께 공동대표로 일하게 된 것이죠. 당시 매년 50억∼300억원의 적자 운영을 면치 못했던 케이블방송, 특히 프로그램 공급회사(PP)를 운영하는 데 따른 심리적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2년 후 ‘마이 티브이’는 그 운영권이 선경그룹의 ‘골프채널’로, 다시 SBS의 ‘골프채널’로 바꿨습니다마는….

10월에 접어들면서, 영화제 창설을 위한 준비모임도 많아졌습니다. 모임은 주로 서울에서 저녁시간을 이용했지만 부산을 찾는 일도 잦아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제 행동반경은 서울∼부산, 서울∼광주, 광주∼부산을 잇는 ‘트라이앵글’로 변했습니다.

부산에서는 영화제 창설에 회의적이었던 경성대학교 주윤탁 교수(작고), 김사겸 감독, 부산일보 김은영 기자를 비롯한 많은 영화인과 언론인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에서는 주로 논현동의 ‘맛나’ 칼국수 집과 교대전철역 근처의 허름한 한정식 ‘유정’에서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 김유경과 박기용 감독이 모여 밤을 지새우며 논의를 거듭했습니다. 진전은 별로 없었습니다. 계획을 다듬는 과정에서 영화제의 추정 예산은 10억원에서 14억원으로, 다시 17억원으로 늘었습니다.

10월 4일,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김인학 상무와 서울에서 만나 5억원의 지원을 다짐받기도 했지만, 12월 초에 지원 계획이 백지화되었습니다. 부산광역시의 지원을 받기 위해 실무접촉을 했지만 반응은 부정적이었습니다. 부산일보의 부일영화상 부활 문제, 부산예총의 연극행사 지원 문제, 2002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부산시가 96년에 추진하고자 하는 ‘아시아 위크’ 행사 때문에 국제영화제 지원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12월 4일, 오세민 정무부시장을 만나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문화공보부 기획관리실장으로 재직할 때 오 부시장은 경제기획원 예산담당국장,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근무해 자주 만났었죠. 김해공항에 내렸을 때 부산에서 이명세 감독의 ‘지독한 사랑’을 연출하고 있었던 오석근 감독이 차를 갖고 마중 나왔습니다. 우리는 부산시청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지석, 김유경과 합류해 오 부시장을 만났습니다. 취지 설명을 들은 오 부시장은 사전에 문정수 시장과 상의했다면서 소요 예산 17억원은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습니다. 이어진 저녁 장소에서 모처럼 기분이 좋아져 오 부시장과 양주 한 병을 반주로 들었고,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소주 두 병을 마신 뒤 서울로 향하는 심야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며칠 뒤 국정남 국회의원을 조직위원장으로 하는 광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가 구성됐다는 기사가 날아들었습니다. 광주국제비엔날레의 창설과 병행해 국제영화제를 개최한다는 것이었죠. 제가 부산국제영화제의 창설을 맡았다는 사실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화계 실상을 잘 알고 있는 제 동료들은 극구 만류했습니다. ‘젊은 친구들과 어울려 일하다가 패가망신할 것이다’, ‘서울에서도 못하는 일을 문화의 불모지인 부산에서 과연 성공할 수 있겠느냐’는 힐책이었죠. 그럴수록 특유의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거의 불가능했던 남양주 종합촬영소 건설도 밀어붙였는데, 영화제쯤이야 못 하겠느냐’는 집념이 속에서 불타고 있었습니다. 12월 13일, 주윤탁, 김사겸, 김지석은 문정수 시장을 방문해 영화제의 기본 구상을 설명했고, 12월 16일의 서울모임(장충동 ‘풀의 향기’)에서는 박광수 감독을 부집행위원장으로 영입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1월 9일, 방한 중인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회동, 부산국제영화제 창설 작업에 동참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1월 17일 오전에 이용관, 김지석, 오석근, 김사겸, 토니 레인즈는 부산에서 오세민 부시장과 김부환 내무국장 등이 배석한 가운데 설명회를 가졌습니다. 같은 날 저녁에는 제 집에서 토니 레인즈를 비롯한 박광수,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오석근, 박기용, 김유경 등 준비 팀 전원이 참석하는 회의를 갖고 영화제의 성격, 개최 시기, 추진 기구 구성 및 사단법인 설립 문제, 추진 계획과 일정 등 구체적인 사항들을 결정했습니다. 영화제 개최 기간은 9월 13일에서 9월 21일까지 9일간으로 하고, 영화제의 성격은 ‘비 경쟁영화제’로 하되 아시아의 새로운 감독을 발굴하는 ‘뉴 커런츠 상’을 시상하자는 데에 의견을 모았습니다.

영화제의 기본 방향을 정한 준비팀은 2월 13일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문정수 시장 주재로 사단법인 부산국제영화제 창립총회를 개최함으로써 부산국제영화제가 정식 출범하게 되었습니다.